PORTRAIT

사람들 이야기

미술 교사와 학생, 예술가 등 미술 교사와 관련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미술 교과서를 탄생시키는 숨은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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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 07.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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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교과서를 매만지는 섬세한 감각, 

해냄에듀 김형국 편집장 인터뷰



한 권의 미술 교과서는 어떻게 기획되고 완성될까.

미술 교과서 개발을 책임지는 편집장의 목소리를 통해, 

미술 교과서의 방향성을 설계하고 

수업 현장의 흐름에 맞게 재구성하는 과정은 

어떤 고민과 원칙 위에서 이루어지는지를 살펴본다.

역삼중학교 교사 이민선이 

해냄에듀 미술 교과서 편집장 김형국을 만났다.




| 인터뷰 진행  이민선(역삼중학교 교사)

사진  임진성

에디터  이진화



이민선  먼저 간단하게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형국  저는 책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보통 출판 편집자라고 하죠. 해냄에듀에서 주로 미술, 문학과 같은 예술 분야의 교과서와 단행본을 만들어 왔습니다. 현재는 미술 교과서 개발 업무를 책임지고 있어요. 회사에서의 정식 직함은 개발실장인데, 보통 ‘편집장’이라고 불립니다. 이 매거진에서도 편집장이네요.

이민선  지금 근무하고 계신 해냄에듀는 어떤 출판사인가요?


김형국  우리 회사는 검인정 교과서와 청소년 단행본을 출간하고 있는 교육 출판 기업입니다. 해냄출판사와 함께 해냄출판 그룹을 이루고 있죠. 해냄출판사는 40년 전통의 중견 단행본 출판사입니다. 한국 출판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비롯해서, 조정래, 이외수 등 우리 문학사의 거장으로 불리는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출간해 왔습니다.

 

이민선  출판사가 문화 예술로 유명한 홍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그런지, 사옥도 뭔가 분위기가 있고 세련됐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형국  저희 사옥은 황두진 건축가가 출판사라는 특성을 홍대의 문화적 성격과 결부시켜 특별하게 설계한 건물이에요. 지금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곳은 사옥 중에서 2개 층을 하나로 연결해서 출판사를 위한 독립된 공간으로 만든 곳입니다. 황두진 건축가가 ‘집 속의 집’의 개념으로 설계했다고 합니다. 

서도호 작가의 설치 작품인 <집 속의 집>이 연상되지요.




황두진 건축가가 설계한 해냄출판 그룹 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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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선  일종의 예술 작품 속에서 근무하는 셈이네요. 그래서인가요, 건물과 회사에서 뭔가 예술의 향기가 느껴지네요. 회사 내부를 둘러보는데, 업무 공간에 멋진 그림들이 걸려 있는 게 눈에 띕니다. 사무실이 아니고 갤러리 같은 분위기가 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김형국  네, 회사 차원에서 좋은 미술 작품들을 꾸준히 컬렉팅하고 있어요. 미술 작품들은 회사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직원들의 업무 공간에 걸어 둡니다. 일하다가도 눈만 돌리면 바로 예술 작품이죠. 지금 걸려 있는 작품들 중에서 윤병락, 김창영, 김산 작가의 그림이 직원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벽마다 걸린 예술 작품들 덕분에 해냄에듀의 업무 공간은 갤러리처럼 감각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민선  말 그대로 미술과 함께 숨 쉬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군요. 그럼, 이제 교과서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책, 그중에서도 교과서를 만드는 일은 뭔가 좀 특별할 것 같은데요.


김형국  글쎄요, 뭔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일반 단행본을 만드는 편집자와는 성격과 역할이 좀 다릅니다. 교과서는 사회적으로 공신력을 지니는 도서이기 때문에, 교육과정평가원이나 시도별 교육청의 꼼꼼한 심사 과정을 통과해야 법적인 교과용 도서의 지위를 얻을 수 있어요. 그래서 일반 단행본을 만드는 것보다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죠. 교과서 한 권이 나오는 데 대략 2년 정도가 걸리는데, 교과서 제출을 몇 달 앞둔 시기에는 그야말로 내용 검토와 수정의 무한 반복입니다. 힘든 일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성취감과 보람도 있습니다.


이민선  보통 편집자라고 하면 말 그대로 책의 편집, 그러니까 원고를 교정하면서 책 내용을 정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교과서 편집자의 업무 범위는 이보다 훨씬 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형국  교과서가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분야의 전문 인력 수십 명이 필요해요. 집필진 이외에도 북 디자인, 조판, 일러스트레이션, 영상 촬영과 제작, 디지털 콘텐츠, 저작권 관리, 인쇄 제작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교과서 개발에 관여합니다. 교과서 편집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 모든 구성원들이 파편화되지 않고 하나의 큰 흐름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구성원들에게 교과서 개발의 방향을 안내하고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율하며 전체 과정을 관리해 나가죠. ‘편집자’라고 부르지만, 방송 프로그램의 PD 역할에 가까워요.


이민선  미술 교과서 개발이 수많은 인력의 큰 프로젝트인 만큼, 일종의 설계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있을 거 같아요.


김형국  맞습니다. 교과서 개발을 시작할 때 개발의 방향, 체재와 목차 등이 담긴 설계도를 먼저 만드는데, 이 설계도의 근간이 되는 것이 교육과정이에요. 교육과정은 교과서 심사의 기준이 되기도 하죠. 먼저 교육과정 총론의 취지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미술과 교육과정의 핵심을 파악한 후에, 교과서의 체재와 목차 등의 구체적 형태를 설계합니다.


이민선  중고등 미술 교과서가 각각 10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언뜻 생각하면 같은 교육과정으로 만든 미술 교과서들은 기본적인 구성이 다 비슷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형국  일정 정도 그런 면이 있죠. 예를 들어 말씀드리자면, 2022 미술과 교육과정의 내용 체계의 뼈대는 크게 ‘미적 체험’, ‘표현’, ‘감상’의 세 영역으로 나뉘고 그 하위로 내용 요소, 성취 기준이 배치됩니다. 이를 교과서로 구현하는 가장 안전하고 검증된 방법은 이 세 영역을 중심으로 대단원 목차를 구성하는 거예요. 지금도 많은 미술 교과서들이 목차에서 이 세 영역을 그대로 따르고 있죠. 그런데 ‘안전하고 검증’되었다는 것은 ‘새롭지 않다’라는 말도 됩니다. 물론 항상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미술 교과서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깊은 고민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이민선  그런데 동일한 교육과정의 틀을 따르면서도 교과서를 차별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김형국  앞의 사례로 이야기를 이어가 보죠. ‘미적 체험’, ‘표현’, ‘감상’의 세 영역은 미술과 교육과정에서 이론적으로 구분한 내용 체계일 뿐입니다. 실제 미술 수업에서는 학습자들이 대상에 대한 감각을 통해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를 떠올리고, 이를 미술 매체와 방법으로 표현한 후에 전시와 감상을 통해 내면화하는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수업 현장에서는 ‘미적 체험’, ‘표현’, ‘감상’의 세 영역이 통합적으로 일어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미술 교과서의 구성 역시 수업의 흐름에 맞게 교육과정의 세 영역을 통합·재구조화하는 방법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즉 미술과 교육과정을 해석하고 재구조화하는 과정에서 미술 교과서의 독창성과 차별성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민선  교육과정을 교실 현장에 맞게 재구조화하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지 않나요?


김형국  그렇습니다. 교육과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변형해서는 안 되겠죠. 무엇보다 교육과정의 핵심이 교실 현장의 교과 수업으로 고스란히 녹아들어 가게 하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겁니다. 저희 같은 경우에는 이번 개발 과정에서 2022 개정 교육과정의 총론, 미술과 교육과정의 핵심 아이디어, 내용 요소, 성취 기준 등을 핵심 키워드로 재구조화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술 교육 이론과 현장의 미술 수업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활용되는 내용들도 함께 조사하여 키워드로 추출했고요. 이 전체의 키워드 덩어리들을 다시 워드 클라우드 방식으로 재분류한 후에, 이를 미술 교과서 전체를 관통하는 큰 스토리 속에 녹였습니다. 학습자가 미술을 만나고 이에 대한 감각과 인식을 자신의 삶과 사회 공동체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큰 서사 속에 교육과정의 이론과 학교 미술 수업의 핵심을 스미게 한 거죠. 해냄에듀 미술 교과서의 목차 구성은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입니다.


이민선  그냥 미술 교과서의 차례만 봤을 때에는 간명하고 심플해 보이는데, 꽤 복잡한 과정을 거친 거군요. 미술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 보죠. 교과서에 실린 작가라고 하면 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작가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미술 교과서에 수록할 작품들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을까요?


김형국  한 작품 한 작품 집필진과 꼼꼼하게 협의해서 결정합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원의 학습 목표와 성취 기준 달성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저는 미술사의 맥락에서 잘 알려진 작품보다 동시대의 삶을 다룬 현대 미술 작품, 그중에서도 중고등학생들 수준에서 흥미를 가지고 다양한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작품들에 비중을 많이 두는 편이에요. 학생들이 지금의 삶을 보다 가치 있게 받아들이려면, 아무래도 오늘날의 삶과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학생들의 미술 활동에 더 의미 있게 작용할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동시대에서도 우리나라 미술 작가들을 소개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이민선  우리 동시대 미술에 대한 관심을 말씀하셨는데, 해냄에듀 중학교 미술 교과서의 표지에는 김재용 작가의 작품이,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와 미술 창작 교과서에는 김지희 작가와 곽남신 작가의 작품이 실린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김형국  그렇습니다. 요즘 교과서 표지 디자인의 트렌드가 일러스트를 활용하는 것이라 고민이 좀 많았습니다만, 김재용, 김지희, 곽남신 작가의 작품이라면 이 정도의 유행(?)을 충분히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 작품들은 현대적 의미가 충분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흥미를 가지고 감상할 수 있는 작품들이거든요. 세 분의 작가님들도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셔서 표지 디자인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죠. ‘Kiaf 서울 2024’ 아트페어 기간 동안 학고재 갤러리에서 김재용 작가의 도넛 작품들을 선보이면서, 저희 중학교 미술 교과서를 같이 전시해 주기도 했죠. 중학교 미술 교과서 표지 작품이 김재용 작가의 도넛 시리즈였거든요.


해냄에듀 미술 교과서의 표지는 김재용, 김지희, 곽남신 등 

동시대 한국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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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남신 작가의 작품 <아다지오>로 표지를 장식한

해냄에듀 고등 미술 창작 교과서

곽남신(1953~/한국)
아다지오(종이 끈, 종이 위에 아크릴 구아슈, 색연필/105X75cm/2022년)



이민선  미술 교과서 디자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의 대단원 표지 디자인은 약간 충격적이었습니다. 미술 전문 잡지 같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무엇보다 작가의 사진을 그렇게 과감하게 배치한 미술 교과서는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김형국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를 펼치면 처음으로 접하는 것이 양혜규 작가가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찍은 사진이에요. 명실공히 동시대 우리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분이시지요. 양혜규 작가가 2019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서기 2000년이 오면> 전시 때 찍으신 사진인데, 예술가의 자기표현, 상상과 변신 등의 이미지가 매우 강렬하게 느껴집니다. 기존의 정형화된 미술 교과서의 틀을 깨고 싶어서 이 느낌을 과감하게 표현해 봤습니다. 물론 현대 미술의 충격 요법 같은 걸 의도한 면도 없지는 않습니다. 

국제갤러리를 통해 독일에 계신 양혜규 작가님과 교과서 콘셉트와 디자인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며 완성했습니다.


이민선  그래서 충격 요법은 통했나요?


김형국  어느 정도는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 본문 서체 전체를 고딕 계열로 변화를 준 것도, 교과서보다는 매거진 디자인의 느낌을 의도했기 때문인데, 많은 선생님들이 예술 잡지나 디자인 서적을 보는 느낌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어요. 해냄에듀 미술 교과서가 높은 채택률을 기록한 데에는 과감한 디자인이 한몫했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습니다.

3cc70c7e0e337d339b2c25a22be3151f_1751700197_91.jpg해냄에듀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 대단원 표지

이민선  디자인도 중요하지만 미술 교사들이 교과서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수업에 필요한 미술 활동이 아닐까 생각해요. 미술 교과서에는 굉장히 많은 활동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두 교과서 저자들의 수업 자료들로 구성하나요?


김형국  미술 교과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부분이에요. 저자 선생님들의 수업 자료가 기본이 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이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편집팀에서는 상상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미술 수업 자료를 찾아 나섭니다. 외국의 미술 교과서를 비롯해 다양한 나라의 사례들도 조사하고, 좋은 미술 수업이 있는 곳이라면 적어도 대한민국 행정 구역 안에서는 다 찾아다닙니다. 집필진의 소개를 받아 미술 선생님들을 찾아가는 것은 기본이고, 블로그나 유튜브, SNS를 수시로 검색해서 미술 선생님들께 연락을 취합니다. 미술 수업 공모전도 지속적으로 진행하고요. 

정말 훌륭한 미술 수업 자료를 발견했을 때에는 잃어버린 아이를 찾은 것처럼 기쁘다가도, 그 자료의 선생님이 다른 미술 교과서의 집필자로 확인될 때의 허탈함은 음, 말로 표현하기 어렵네요.


이민선  음, 어떤 심정인지 약간 이해가 되네요. 미술 교사에게도 좋은 수업 자료는 정말 절실하거든요. 그래서 미술 교사들은 수업 자료가 많은 교과서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김형국  아무래도 미술 활동 자료가 많으면 선생님들 입장에서는 이것저것 골라 쓰기가 좋지요. 최근 미술 교과서들이 미술 활동에 넘버링을 해 가며 백화점식으로 배열하곤 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런 식이면 미술 교과서가 자칫 미술 활동 자료집이 될 수도 있거든요. 양적으로 많은 미술 활동을 수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과서의 체계적인 구성에 미술 활동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가게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교과서 소단원이 하나의 미술 수업을 위한 스토리로 구성되어야겠죠. 실제 미술 수업 과정과 교과서 소단원의 흐름이 일치되도록 구성하는 거죠. 미술 선생님들이 교과서를 잘 활용하지 않는다고들 이야기하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기존의 교과서들이 현실의 미술 수업의 흐름과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 괴리를 좁혀 나가는 것이 저에게도 큰 숙제입니다.


이민선  실제 미술 교과서를 참고하지 않고 본인이 연구한 활동으로 미술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들도 많지요. 교과서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고민이 되는 지점일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디지털 매체가 미술 수업의 중요한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는데, 미술 교과서 개발에 이에 대한 고려도 필수적일 것 같습니다.


김형국  미술 수업에서 디지털 매체는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아이디어 구상이나 표현에서 아날로그 방식보다 훨씬 자유롭고 학습자 간의 상호 작용에도 활용도가 높습니다. 환경 쓰레기를 만들어 내지 않는 것도 큰 장점이죠. 아예 디지털 매체로 별도의 단원을 구성하기도 합니다만, 기존의 평면, 입체 활동에서도 디지털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디어 보드나 생성형 인공지능은 작품 구상 과정에서 창의적 사고를 활성화하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이민선  디지털 매체와 관련하여, 2022 개정 교육과정 미술 교과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면 QR 코드의 도입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R 콘텐츠는 어떤 점에 비중을 두고 제작을 했나요?


김형국  그동안 여러 출판사에서 제공한 멀티미디어 자료들이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번 QR 콘텐츠 제작 과정에서는 미술 선생님들이 실제 수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제작하는 데 방점을 두었습니다. 교과서 미술 활동 중에서 시범이나 안내가 필요한 내용이라든가, 오일 파스텔, 먹과 같은 재료의 활용법, 미술 수업 진행에 꼭 필요한 지식과 이론 등을 고해상도 영상, 카드 뉴스 등 다양한 형식으로 제작했습니다. 특히 수업에 필수적인 활동지는 모두 디지털화하여 QR 코드로 심었습니다. 물론 디지털 자료이기 때문에 디지털 매체에서 직접 그리거나 작성할 수 있고, PDF 형태로 인쇄하여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지방 학교에 재직 중인 어느 미술 선생님께서 수도권 학교를 제외하면 학생들과 미술관 견학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국립현대미술관 연구원과 협업해서 디지털 미술관을 만들고 QR 코드로 연동시켰죠. 실제 국립현대미술관처럼 주제별로 다양한 전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민선  들으면 들을수록 미술 교과서를 만드는 일은 참 어려우면서도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미술 교과서를 만드는 나름의 철학이 있지 않나요?


김형국  지인 중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미술은 일상에 고정된 자신을 환기시켜 주는 바람과 같다.’라고요. 미술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정말 잘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대개 ‘일상’에 ‘고정’된 삶을 살죠. 그런데 우리 일상의 대부분은 사회적 질서로 규정되고 구축된, 일종의 고정 관념의 세계일 겁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사회가 규정한 틀에 얽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죠. ‘자신의 욕망은 결국 타인의 욕망’일 뿐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통찰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미술은 바로 세상에 대한 ‘감각’을 발판 삼아, 우리 스스로가 삶의 ‘온전한 주체’로 존재할 수 있게 도와주는 도구가 됩니다. 

대개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맛집’이라면 왠지 신뢰가 가는 것도, 주관적 속성인 미각 역시 타인을 더 신뢰하는 경향에서 비롯된 거겠죠. 미술은 바로 세상에 대한 감각이 오롯이 자신의 것이며, 이것이 매우 의미 있고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좋은 미술 활동은 오감에서 비롯된 감각을 세상에 대한 지각으로 확장시켜 주는 역할을 하죠. ‘열린 감각’으로 세상을 마주하고, 이를 ‘세상에 대한 주체적 인식’으로 넓힐 수 있도록 하는 것, 바로 이 점이 미술 과목의 존재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좀 추상적인 듯 하지만 미술 교과서를 만들면서 길을 잃었을 때 저에게 이정표가 돼 주는 생각입니다.


이민선  열린 감각과 세상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라...... 곱씹어 보게 되는 말이네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포부나 계획이 있다면요.


김형국  어느 중학교에서 남학생 몇 명이 미술 시간에 했던 퍼포먼스가 생각납니다. 종이 박스로 조악하게 문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아마 소통과 위로의 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관객 참여형이라 관객이 작품의 일부가 될 때 의미가 생기는 그런 작품이었어요. 누구라도 이 문을 열면, 그 뒤에 있던 학생이 다가와 말없이 꼭 안아 줍니다. 장난기 다분한 중학교 남학생들이었는데, 멋쩍어하면서도 서로를 꼭 안아 주는 아이들의 모습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어떤 아이에게는 그 짧은 포옹에서 느껴진 따스한 온기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았을 거 같았죠. 미술 수업 하나가 아이들 마음속 깊은 곳의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아이들 서로 간의 진실된 교감에까지 이르게 한 거죠. 저에게는 그 어떤 미술 작품보다 감동적이었습니다. 

미술 교과서를 만들다 보면, 이렇게 보석처럼 아름다운 미술 수업을 하는 선생님들을 정말 많이 만납니다. 거창한 포부나 계획은 없습니다만, 이런 훌륭한 미술 선생님, 좋은 미술 수업을 열심히 찾아 교과서에 소개하고, 또 많은 선생님들이 이 수업들로 아이들과 의미 있는 경험을 쌓아 가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설레는 마음으로 현장의 미술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진심이 담긴 미술 교과서를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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