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디자인하다, '이승리'의 꿈과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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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순간들을 견뎌 내고 마침내 꿈을 향한 여정의 출발선에 선 한 학생,
그리고 그 곁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보며 응원을 보낸 한 교사가 있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4학년인 이승리 학생과 평택 비전고등학교의 임종삼 수석교사가 그 주인공이다.
점에서 시작해 선으로, 선에서 다시 꿈의 형상으로 이어지는 둘만의 특별한 여정,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 글 임종삼(비전고등학교 수석교사)
| 사진 김형국
| 에디터 이진화


"승리야! 너는 그림자 속에도
언제나 빛이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해 냈구나."
"선생님께서 제 마음의 틈을 빛으로 채워 주셨어요.
이제 그 빛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이 스승의 날이네요. 자주 연락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3학년이 되니까 확실히 과제가 어려워지고, 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그래도 제가 지금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디자인을 배울 수 있는 이유가 다 선생님의 열정적인 지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전고에 처음 입학했을 때, 제가 과연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고, 스스로도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매번 선생님이 용기를 주셨습니다.
선생님에게 그 어떤 입시 학원보다도 더 훌륭한 지도를 받았고요. 덕분에 제가 오고 싶었던 대학에 들어와서 이렇게 원하는 공부를 맘껏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ㅎㅎㅎ~, 선생님, 늘 감사합니다!! 6월 19일쯤 종강하는데, 그 전에 다시 연락드리고 찾아뵙겠습니다.
2024년 5월 15일 승리가 보내온 문자 메시지
입시 설명회
승리를 만난 것은 승리가 중학교 3학년 때인 2018년이다. 수석교사로 발령을 받아 중학교에서 5년을 근무하고 고등학교로 자리를 옮긴 첫해였다. 비전고등학교는 경기도 평택시에 소재한 일반계 고등학교이다. 경기도교육청 정책에 따른 고교 비평준화 지역이라서 중학교 내신 성적으로 학생들을 선발한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모두 사라졌지만, 일부 지역에는 아직도 중학생들을 학업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고교 진학 제도가 남아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매년 11월이면 평택시에 소재한 고등학교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의 지원을 유도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한다. 나는 비전고등학교의 교육 활동을 소개하고 진로, 진학을 상담하는 자리에서 승리를 처음 만났다.
저녁 7시가 넘은 시간, 미술 계열 진학을 희망하는 중학생과 학부모가 모이는 교실에 들어갔다. 본교에서 미술 과목을 지도하고 있고 미대 진학 지도를 담당하는 교사라고 나를 소개한 후,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여러분, 미술대학에 왜 가려고 합니까?”
미술대학 입시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묻고 입학 상담을 받기 위해 학교를 방문했는데, 교사의 엉뚱한 질문에 다들 어리둥절한 모습들이다.
“그냥 미술이 좋아서요.” 짧지만 학생 대부분이 답하는 내용이다.
“학생들에게 한 가지 더 질문하고 답변드리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선택한 미술, 미술이란 무엇인가요? 미술을 설명해 보세요.”
‘이건 또 뭔지?’ 첫 질문보다 더 난감하다는 표정이다. 슬슬 불만스러워하는 표정도 엿보이기 시작한다.
“여러분! 미술을 좋아한다고 미술을 진로로 선택하면 안 됩니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선택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과목 성적이 낮아서 미술 학원에 다니고 있다면 최악의 진로 선택입니다. 미술을 좋아하고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원하는 미술을 잘하기 위해 오히려 다른 과목과 여러 분야의 공부가 더 필요합니다. 잘 그린 그림이 미술이 아닙니다. 예쁜 컵과 화려한 의상으로 디자인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기 많은 웹툰 작가를 롤 모델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미술을 낭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유명 화가나 디자이너는 대개 꾸미고 연출한 장면입니다. 모든 직업을 통틀어 가장 힘든 도전과 혁신, 자기 주도성과 남다름을 필요로 하는 분야는 예술, 바로 미술의 세계입니다. 그래도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고, 기어이 해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서면, 미술을 선택하세요.”
이어서 미술의 기본은 시각적인 표현이므로 틈만 나면 주변의 사물을 관찰하고 주위 풍경과 인물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 자기표현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것, 입시 미술 학원에서 배운 테크닉만 가지고는 훌륭한 미술가로 절대 성장할 수 없다는 것,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 또 잘해야 한다는 것, 새로운 도전과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호기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 등을 강조해서 말했다.
이 자리에 승리도 앉아 있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짧은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 차분함이 승리의 첫인상으로 기억된다. 함께 온 엄마의 적극적인 질문에 오히려 옆에 앉아 있던 승리가 눈에 들어왔다. 남다른 특별함을 간직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조용한 학생이었지만 내면의 강한 열정과 목표를 숨기지는 못했다.
그날 승리 어머니는 딸을 대신해서 많은 것을 질문하셨다. 학교 프로그램과 미술 수업, 미대 입시 준비를 물으셨고, 미술을 좋아하는 승리가 예고에 갈 수 없었던 사정도 말씀하셨다. 승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호주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언니를 따라 유학을 떠났다가 작년 말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학교 공부가 걱정된다고 하셨다. 승리가 비전고에 들어와서 원하는 미술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학부모의 간절함과 소망이 느껴졌다. 어머니의 당부에 어떤 말씀을 드렸는지 모두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매년 입시 상담을 마치면서 학부모에게 전하는 끝인사가 있다.
“미술 교사로서 느끼는 행복은 미술로 학생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입니다. 가장 큰 보람은 미술을 선택한 학생이 원하는 진로나 진학에 성공한 모습입니다. 학교에 미술 교사가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자녀를 비전고에 보내 주시면 좋은 수업으로 아이들과 만나겠습니다. 자녀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미술로 자기 생각을 맘껏 표현하는 힘을 길러 주겠습니다.”
자기소개 그림
나는 어렸을 때, 점 잇기 도안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숫자를 따라가면서 점을
하나하나 연결하다 보면 어느새 그림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을 연결하지 않는 이상
어떤 그림인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조용한 성격에 쉽게 나를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나랑 오랫동안 얘기하지 않는 이상
나를 알기가 어렵다. 하지만 나와 얘기를 나누고
친하게 지내다 보면, 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림 속 모든 점을
차례로 연결하면 내 모습이 나타난다.
제가 궁금하신가요? 점들을 연결해 주세요.
이승리, <나를 소개합니다>, 2019

승리가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그린 첫 그림이다. 1학년 미술 시간의 수업 주제는 ‘그림으로 자기소개하기’였다.
“말과 글이 아닌 점과 선, 면과 색 등 조형 언어로 자기를 소개해 보세요. 내면이나 외형적 특징, 친구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자신의 색다른 모습 등을 이미지로 표현하세요. 표현 방법이나 재료, 도구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자유롭게 발상하여 적극적으로 표현하되, 특별한 자기소개 방법을 찾아보세요.”
승리의 자기소개는 특별했다. 승리는 자기 모습을 밑그림으로 재현한 다음 이를 따라 차례대로 점을 찍었다. 그리고 연필 선을 지워 버렸다. ‘얼굴 없는 자화상’이 된 것이다. ‘내가 궁금하면, 나를 그려 보라’라는 주문이 기발하다. 왼쪽 1번 점에서 시작된 선을 40번 점까지 연결하면 승리의 얼굴 모습이 그려진다. 다시 오른쪽 1번 점에서 출발하여 59번 점까지 선을 잇게 되면 그림이 완성된다. 도화지 위에 미리 찍어 놓은 점들을 연결하면, 그때서야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보여 준다.
승리의 그림 속 점은 단순한 점이 아니다. 자기 모습을 만들어 가는 점, 점은 선이 되어 다음 점을 향해 달려가고, 숫자가 높은 점과 만날수록 승리의 모습이 선명해진다. 그 모습은 처음부터 승리가 설계한 자신의 완성된 모습이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누가 승리를 그려 내고 있는가? 누가 완성된 모습으로 승리를 그려 줄까? 바로 승리와 함께하는 주변 사람들이다. 어쩌면 승리는 미술로 진로를 선택해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있지만, 확실한 자기 모습을 볼 수 없는 현실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유학 기간의 공백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승리가 학교생활에 적응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다른 교과 성적에 대한 부담감이 적지 않았다. 좋아하는 미술 쪽으로 진로를 정했지만, 틀에 박힌 입시 미술에 대한 거부감도 컸다. 그래서 승리의 자기소개 그림은 단순한 점 잇기 자화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를 봐 주세요.’라는 도움의 손길로 다가왔다.
승리의 성장통
지금 아이들이 마주하고 있는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낯설고 혼란스럽다. 가장 안전해야 할 배움의 공간인 학교가 무한 경쟁의 장이 되면서 학생들에게 성적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안겨 주고 있다. 사회적 갈등의 심화와 변화된 가족 관계 속에서 아이들의 걱정과 불안, 고민은 늘어만 가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각자의 마음속 문제를 어디에서 풀 수 있을까? 내가 미술 시간에 ‘수호천사’를 등장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지텔링(Image Telling), 수호천사 프로젝트’는 자신의 고민을 함께 나눌 수호천사와 함께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설계된 수업이다. 자신의 고민과 걱정을 이미지로 고백하고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속 응어리를 풀어내는 시간이다. 미술 창작의 과정에는 본질적으로 정서적 치유의 능력이 내재되어 있다. “이미지텔링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수호천사’는 말 그대로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 주는 천사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지지해 주고 안전하게 도와주는 존재를 말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있나요? 만약 내 앞에 수호천사가 나타난다면 어떤 도움을 받고 싶은가요? 그 수호천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아 내가 가진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이 담긴 그림을 네 개의 장면으로 표현해 보세요.”




이승리, <수호천사 프로젝트>, 2019
(좌상) 1 출구 없는 일상에 갇힌 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시간만 흘려보낸다. 하루빨리 지겹고 지루한 지구 행성에서 벗어나고 싶다.
(우상) 2 어느 날, ‘수호천사’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지구 행성에서 힘겹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좌하) 3 이름은 ‘로켓맨!’, 떠돌이 우주인이다. 우주 곳곳을 탐험하는 로켓맨은 나에게 영원한 모험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나는 로켓맨의 손을 잡았다.
(우하) 4 지구 행성에서 벗어난 나는 로켓맨과 같이 우주여행을 떠난다. 광활한 우주 공간에서 맘껏 자유를 즐긴다. 그리고 나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승리는 자신을 ‘일상에 갇힌 나’로 표현했다. 하루빨리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하게 다가왔다. 유학 생활을 중도에 접고 다시 한국의 치열한 경쟁 사회로 돌아온 승리는 확실히 학교생활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네 번째 그림 속 말풍선, ‘and I never came back, I never will, never.’ 지구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승리의 굳은 결심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승리는 소음에 예민한 성격을 가진 여고생이었다. ‘한곳에서 오래 사는 것’, ‘한 가지 일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을 못 견뎌 한다고도 했다. 확실히 예술가적 기질을 타고난 학생이다. 이런 학생들은 틀에 박힌 방식을 벗어나 자신만의 탐구와 배움을 추구할 때 훌륭한 성과를 만들어 낸다. 승리는 자유로운 화가 ‘바스키아(Basquiat, Jean-Michel)’를 좋아했고, 초현실적인 디자이너 ‘토거슨(Thorgerson, Storm)’의 작품 감상을 즐겼다. 자신도 장래 ‘그래이저(Glaser, Milton)’와 같은 유명 디자이너가 되어 자신만의 브랜드를 붙인 스튜디오를 갖고 싶다고 했다.
승리는 미술 실기 학원에서 반복되는 기능적 표현을 어려워했다. 학업 성적을 강조하는 미대 입시에서 국어와 수학, 과학 과목 성적은 승리에게 힘겨운 과제였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다. 지구별의 현실, 특히 한국의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성장통이기도 했다. 지도교사로서 무엇을 어떻게 해 줘야 할까? 먼저 로켓맨의 손을 잡고 각박한 현실을 떠나 우주로 날아가고 싶은 승리를 공감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승리가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여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첫 디자인 작품
승리에게 주어질 미션이 우연히 찾아왔다. 학교 행정실장님이 수석교사실을 찾았다. 이번에 지역 교육청에서 예산을 지원하여 교내 3개 층의 홈베이스에 학생용 탈의실을 설치할 예정이란다. 그래서 담당 업체에서 몇 가지 디자인 시안을 보내왔는데, 어떤 것이 좋을지 미술 선생님이 선정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다. 업체가 제작한 카탈로그를 살펴보다가 문득 승리가 떠올랐다. 그동안 승리가 미술 시간에 보여 준 능력이라면 탈의실 디자인 정도는 충분할 것 같았다. 먼저 행정실장님을 설득하고, 다음 날 학교장과 부장 교사들의 협의체인 기획 회의에서 탈의실 디자인을 학생이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본교 학생들이 사용할 탈의실을 재능 있는 학생이 디자인하면 교육적 의미가 적지 않다는 점, 해당 학생에게는 큰 경험과 배움이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게 승리에게 자신의 재능을 공동체에 기부할 기회가 주어졌다.
역시 승리는 남달랐다. 탈의실 디자인을 제안했을 때 주저함이 없었던 승리는 며칠도 지나지 않아 밑그림을 보내왔다.
아이디어를 간단하게 보여 주는 러프 스케치와 디자인을 완성한 시안 모두 별다른 피드백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밑그림은 완성된 모습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처음부터 완벽했다.
3, 4, 5층 홈베이스에 각각 7개씩 설치된 탈의실은 매우 훌륭했다.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반응도 좋았다. 총 21개가 설치된 간이용 탈의실은 노랑과 연두, 분홍과 연두색의 조합으로 밝고 에너지 넘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이 디자인에서는 출입문 그림이 가장 중요했다. 승리는 학교 건물을 배경으로 남학생과 여학생의 모습을 픽토그램 이미지로 연출했다. 그리고 그 속에 미래 비전을 위해 배우고 성장하는 비전고 학생의 모습을 담았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꿈꾸는 승리의 첫 작품이다.
이승리, <비전고 학생용 탈의실 디자인>, 2020
도전, 꿈은 이루어진다
“선생님, 저 합격했어요.”
분명 승리 목소리였다. ‘합격’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쁨과 안도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승리의 첫마디에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갑작스럽게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느라 잠시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승리가 해냈다. 장하고 대견했다. 그날의 벅찬 감동은 교직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특별함으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2021년 12월 16일, 늦은 오후 시간이었다.
사실 2단계 면접 평가를 마친 날 저녁, 승리와 전화 통화를 끝낸 뒤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면접 문제 중 하나는 드로잉 실기라서 쉽게 해결했지만, 도판으로 제시된 작가 작품을 보고 생각을 말하는 구술 면접에서 어려움이 많았다고 했다. 처음 보는 작가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할 틈도 없이 계속된 질문에 어떤 답을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심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승리를 믿었다. 지난 3년간 승리가 기울인 정성과 노력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번 면접시험도 철저하게 준비했다. 출제 경향을 자세히 분석했고, 예상 문제를 뽑아서 여러 번의 테스트를 거쳤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면접 평가 하루 전날 홍대 앞 숙소에 자리를 잡은 승리와 원격 화상을 연결하여 밤 10시가 넘도록 마지막 모의 평가까지 마쳤다. ‘무엇이든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도울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와 함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합격자 발표가 나고 며칠이 지난 뒤, 학교로 승리 부모님이 찾아오셨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승리를 주인공으로 부모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승리가 초등학교 때 한국에 들어왔다가 6학년 때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을 떠났고, 호주 이민법 개정으로 중학교 3학년 학기 중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사연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쉽지 않았던 학교생활, 미술 분야로의 확고한 진로와 진학 준비 등 승리에게 있었던 지난 일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살아났다. 승리는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 자녀 교육에 헌신해 온 훌륭한 부모님이었다. 승리가 누리는 합격의 기쁨은 모두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과 지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어디 가족뿐이었겠는가? 승리를 지도해 주신 담임선생님과 교과 선생님들, 학원 선생님, 승리가 읽고 감명받은 책의 저자들, 주변 친구들까지 모두 승리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이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떠오른다. 운 좋게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날 같은 선물을 받았다.
“승리야, 다시 한번 합격을 축하한다. 그리고 고맙다.”

미래를 꿈꾸는 디자인 학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에 학교에서 팝업 전시를 준비하는데, 이번 달 25일에서 29일까지 운영해요.
시간 나시면 들러 보세요 ㅎㅎ~~!! 저는 여기서 그래픽 디자인을 담당했습니다.
오~ 그래, 전시회에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했네.
훌륭하고 대견하다. 전시 준비로 고생 많았고, 그만큼 보람도 컸겠네.
그래, 선생님이 시간 되면 보러 갈게. 전시로 큰 성과 거두길 바란다. 반가운 소식 고맙고~^^
승리가 반가운 문자를 보내왔다. 2024년 9월 25일부터 5일간, 학교에서 자신이 참여한 특별한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전시 포스터 상단에 쓰인 ‘The Cool Case Club’이란 타이틀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미 전시회를 소개하는 사이트가 개설되어 있었고, 여러 언론 매체와 함께 문화체육관광부,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도 전시회를 알리고 있었다.
‘쿨케이스클럽’은 소셜 아트 무브먼트를 위해 탄생한 홍익대학교 아트앤디자인밸리에서
활동하는 가상의 단체로, 진부하고 뻔한 폰케이스 디자인을 타파하고 개성적인 케이스가
사회의 뉴노멀(New Normal)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패션처럼 폰케이스도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쿨케이스클럽은 이번 전시회에서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케이스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 <중앙일보>, 2024년 9월 24일 자 기사
홍익대학교 학생들이 MZ세대의 감성을 담아낸 폰케이스 디자인 전시회였다. 이 행사에서 승리는 전체 그래픽 디자인을 담당했다. 특히 승리는 ‘PIZZA GALAXY’와 ‘FISHMAN’이라는 제목의 두 작품으로 기발한 스토리텔링을 들려주었다. ‘은하계의 모든 생명체와 행성이 피자로 만들어졌다면?’, ‘붕어빵을 먹으면 물고기 인간으로 변하는 세상이 있다면?’과 같은 엉뚱한 질문에서 시작된 이야기이다.
승리가 보낸 문자에 답을 하면서, ‘역시 승리!’라는 생각을 했다. ‘제가 오고 싶었던 대학에 들어와서 이렇게 원하는 공부를 맘껏 하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던 승리가 이름 그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명문 미술대학에서 열린 산학 협력 프로그램 특별 전시회에서, 승리는 디자인 학부를 대표했다. 전시회 그래픽 디자인 전반을 총괄하여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출품작으로 자신의 이름까지 높이고 있었다. 어엿한 디자이너가 된 승리의 첫 출발이다.
승리는 늘 그래 왔다. 자기 계발과 성장에 힘써 왔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수업과 동아리 활동, 독서와 창작 활동에 부단한 노력과 정성을 쏟았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굳은 결심과 의지로 이를 극복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승리는 더 높이 비상할 것이다. 꿈과 열정으로 미래를 만들고 있는 승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 승리야, 오늘 선생님의 마음속에 한 폭의 대형 현수막을 걸었다. ‘축, 이승리의 성공적인 디자이너 데뷔!’라는 글귀를 선명하게 적었다. 진심으로 자랑스럽구나.




(좌) 이승리, , 2024
먼 우주 어딘가, 모든 것이 피자로 만들어진 곳이 있다. CH-3353(치즈) 별 출신 피자들이 은하계를 완전히 정복하여 모든 행성을 피자로 만들어 버렸다.
어쩌다가 이곳을 발견하게 된 탐험가 A군은 모든 행성을 한 번씩 구경하자는 장대한 목표를 세워 피자 갤럭시를 열심히 누비고 있다. (Pizza Galaxy)
(우) 이승리, , 2024
먼 우주 어딘가, “FISHMAN(물고기 인간)”이라는 종족이 사는 곳이 있다.
어느 날 바다에 붕어빵들이 등장하는데, 이 붕어빵들을 잡고 먹자 지금의 모습인 “물고기 인간”으로 변한다. 외형만 제외하면 물고기 인간들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Fishman)
승리와 함께한 봄날의 캠퍼스

봄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속살엔 서늘한 잔향이 남아 있던 어느 날,
승리가 다니고 있는 홍익대학교 서울 캠퍼스를 찾았다.
올해 4학년이 된 승리는 홍익대학교 영자 신문사(The Hongik Tidings)
편집장이 되었다. 매년 네 차례 영문 잡지를 발행하며 국내외의
외국인들에게 학교를 홍보하고, 학생들에게 다양한 분야의 학술적 교양을
전하고 있다. 우리말보다 영어를 잘하는 승리에게 더없이 잘 어울린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밴 대학 신문사 편집실과 봄꽃 향기가 은은한 교정의
벤치에서, 승리와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해 가며 서로의 생각을 풀어냈다.
임종삼 Hongik Tidings. 신문사 이름인가 보구나.
이승리 네, 선생님. 홍익 소식, Hongik Tidings라고 불러요. 이건 지난달에 나온 3월호 신문이에요. 제가 쓴 기사가 여기 나옵니다. ‘Korea’s democracy blood- stained commitment(한국의 민주주의: 피로 얼룩진 헌신)’, 이번 신문의 특집 기사로 다룬 내용이에요.
임종삼 승리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었네. 디자인을 공부하는 미대생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정치와 경제, 문화를 조사하고 보도하는 시사 저널리스트로도 활동하고 있었네. 너무 훌륭하다.
이승리 아~ 하하(웃음), 아닙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요.
임종삼 3년 넘게 홍익대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재학생으로서 느낀 점이 궁금하네. 어떤 점이 좋았니?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명문 미대생으로 자부심이 적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승리 사실 자부심 같은 것은 크게 못 느꼈어요. 물론 처음 홍대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좋았죠. 제가 너무나 오고 싶었던 학교니까요. 그런데 입학하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은 별로 없었어요. 좋은 점은 훌륭한 교수님과 뛰어난 친구들을 많이 만난 거예요. 특히 영어로 전공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구요. 외국인 교환 학생들과 팀 프로젝트를 하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재미있어요. 유능한 친구와 선배들을 다양하게 만나고 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은 것이 학교가 준 가장 큰 선물 같아요.
임종삼 실제로 전문적인 시각 디자인 공부를 해 보니까 어떠니? 아직은 학부생이지만, ‘디자인은 이런 것이다.’라는 관점에서 승리의 생각이나 느낀 점을 말해 줄 수 있을까?
이승리 아직 제가 공부 중이라서 디자인을 한 마디로 말씀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해 보니까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거와는 다른 부분이 많더라고요. 디자인하면 흔히 예쁜 것, 잘 꾸미는 것, 그래서 무언가를 포장하고 만들어 내는 기능적인 것으로 많이 이해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전공을 하다 보니 정말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더라고요. 사실 기능적인 것은 디지털 도구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잖아요. 그래서 주어진 문제를 다르게 해결하는 발상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생각해요. 1학년 때부터 많은 걸 배워 왔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문제 해결 과정이었어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이걸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연습을 해 왔던 거죠.
임종삼 디자인과 진학을 준비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선배로서 당부해 줄 말도 있을 거 같은데?
이승리 음, 제 경험에 비추어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요. 미술 시간에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다른 교과 활동도 아주 중요해요. 그래서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어떤 수행 과제를 내주면, 어떻게 해서든 미술 관련 쪽으로 주제를 잡고, 발표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제가 2학년 때 ‘생활과 윤리’ 선생님이 ‘윤리적 문제’와 관련된 수행 과제를 내주셨는데요, 저는 그때 ‘예술 작품의 윤리성’에 관한 내용으로 발표를 했어요. 그때 선생님이 칭찬을 많이 해 주셨고, 그 내용을 미술 활동 보고서에 넣어서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특히 실기가 아닌 수시 전형을 준비하고 있다면 이런 활동을 많이 해야 해요.
임종삼 그렇다면 미술 선생님들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이 매거진은 전국의 많은 미술 선생님들이 보시게 될 거야. 미대생 승리가 학교 미술 선생님들에게 드리는 부탁, ‘이런 미술 수업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제목을 붙인다면,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이승리 아이고, 제가 어떻게…… 갑자기 부담되네요. 음, 이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미술 수업에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주셨으면 좋겠다고요. 결과보다는 과정이요. 미술 시간에 친구들끼리 많이 토론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주셨으면 합니다. 완성된 작품도 중요하지만, 왜 그렇게 그림을 그리고,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 그 생각과 과정을 친구들과 나누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표현 방법이나 재료도 자유롭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꼭 도화지에 그림만 그려야 하나요? 그림을 못 그리면 사진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요즘에는 디지털 도구도 많으니까요.
임종삼 그래, 요즘 미술 선생님들이 많이 고민하는 과정 중심 평가를 승리가 말해 주었네. 표현 매체의 자유로운 선택과 활용도 그렇고. 나도 반성하게 되네. (웃음) 한 가지만 더 묻자. 승리가 꿈꾸는 삶은 어떤 것일까? 디자인을 전공한 제자의 꿈이 궁금하구나.
이승리 저는 살아가면서 늘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일을 함께 만들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제 주변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고, 저 자신도 거기에 맞춰 계속해서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임종삼 지금 승리가 이야기하는 내용에 디자인의 철학이 담겨 있구나. 항상 같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미래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신념. 승리는 디자이너이자 예술가일 수밖에 없네. 그래, 선생님이 승리의 앞날을 응원하마. 미래를 디자인하는 승리 ‘만세!’다.
이승리 하하,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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