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기억을 쌓아 올린 빛의 공간, 남양성모성지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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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은 시간 위에 쌓이는 기억의 무게를 견뎌낸다.
그리고 그 시간을 기억하는 몸이 되어 삶과 역사의 흔적을 품는다.
경기도 화성의 남양성모성지는 그러한 건축의 힘을 오롯이 보여 주는 공간이다.
이곳은 시간과 신앙, 예술과 기억이 공명하며, 방문객에게 치유와 평화를 안겨 준다.
늦은 오후의 사광이 부드러웠던 날, 한 미술 교사가 빛으로 충만한 이 공간을 찾았다.
| 글 김효희(대안여자중학교 교사)
| 사진·에디터 김형국
아픔의 땅 위에서 공명하는 예술과 신앙
한낮의 해가 조용히 저물어 가는 고요한 시간.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대성당과 주변을 감싸는 온화한 풍경은 마음에 온기를 더한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풀과 꽃들은 성지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이곳이 오랫동안 잊혔던 땅, 그것도 피로 물든 장소였음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남양성모성지는 조선 시대 병인박해 때 순교자들이 처형된 곳이다. 수백 년 전, 공기 중에 흩어졌을 간절한 기도와 비명, 아픔이 스며든 장소이다.
1989년, 작은 광장과 간소한 십자가가 전부인 이 황무지에 이상각 신부가 부임했다. 이후 3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신부는 맨손으로 땅을 일구고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성지를 가꿔 나갔다. 그는 누구라도 이곳에서 위로와 치유를 얻기를 바랐다. 그 한결같은 소망은 끈질긴 인내와 헌신으로 이어졌다. 신부는 남양성모성지가 단순히 종교적인 예식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영적인 깊이를 느끼고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는 예술이 영혼에 말을 걸고 신성함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강력한 매개체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는 대성당 건축의 간절한 소망으로 움텄고, 보타(Botta, Mario)라는 건축가와의 인연으로까지 이어졌다. 건축의 장소성, 역사성을 존중하고 빛과 기하학을 통해 영적인 의미를 탐구하는 보타의 건축 철학은 성지에 대한 이상각 신부의 비전과 깊이 공명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대성당 건축의 밑거름이 되었고, 마침내 예술과 신앙이 공존하는 특별한 공간을 탄생시켰다.




성지 입구부터 대성당까지 오르는 과정은 마치 마음을 정돈하는 여정과도 같다. 잘 가꿔진 묵주의 길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은 저만치 멀어지고, 새들의 지저귐과 청량한 바람, 생동하는 식물들에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내 안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우고 성스러운 공간으로 들어설 채비를 마친다. 묵주의 길 끝에 다다르자 언덕 위에 대성당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산과 산 사이 계곡에 폭 안긴 대성당은 성지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60만 장의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대성당은 이 땅의 기억과 시간을 담고 있다. 높이 50m에 이르는 두 개의 거대한 원형 탑은 마치 등대처럼 성지 전체를 조망한다. 그 앞에 가만히 서서 올려다보면 육중한 몸집의 탑은 어느덧 나를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안는다. 정각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를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선다.


붉은 벽돌로 빚은 빛의 전당
대성당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다소 어둑한 공간은 아래쪽에서 번져 나오는 아스라한 빛으로 경건한 분위기에 휩싸인다. 걸음을 늦추어 천천히 오르다 보면 몸과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윽고 대성당 출입문을 조심스레 열어 본다. 순간, 아찔한 전율과 왠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낀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정면으로 쏟아지는 빛과 십자가다. 두 개의 탑 사이 길고 좁은 슬릿창으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창의 세로선을 따라 공중에 매달린 십자가에 시선이 멈춘다. 십자고상의 예수는 고통에 신음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춘다. 그를 감싼 빛이 눈부시게 사방에 퍼진다. 예수는 빛을 따라 하강하는 듯한 형상으로 신성한 아우라를 발산한다. 십자고상은 반지(Vangi, Giuliano)의 작품이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과 뜬 눈은 ‘모든 인류를 부둥켜안을 살아 있는 예수’를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이곳을 방문하는 순례객들은 대성당 어느 위치, 어느 각도에서나 ‘지금 여기’에서 부활한 예수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무로 섬세하게 조각된 3.5m의 예수상은 카본 소재의 십자가와 대조를 이루며 강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십자고상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좌우 공중에 성화가 매달려 있다. 각각 가로 10m, 세로 3m의 크기로, <최후의 만찬>, <주님 탄생 예고>, <엘리사벳 방문>을 주제로 하고 있다.



화려한 색이 아닌, 흙빛에 가까운 모노톤으로 표현된 성화는 소박하면서도 단순하지만, 보는 이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성화는 앞면뿐만 아니라 뒷면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성화 속 인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최후의 만찬>에서는 보타와 이상각 신부의 모습을, <엘리사벳 방문>에서는 한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대성당의 오늘을 만든 이들을 기리면서 한국에 대한 애정도 드러낸 것이다. 특수 유리에 담긴 성화는 다양한 기법의 획기적인 시도를 보여 준다.
“낯설음은 예술이 말을 거는 방식이다.”라고 했던 반지는 기존의 십자고상과 성화를 답습하는 것에서 벗어나, 이 시대의 감각으로 해석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자 했다. 십자가를 등지고 성당 내부 전체를 바라본다. 1,300석 규모의 웅장한 성당이지만 아늑하게 느껴진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성당 벽과 기둥, 나무로 된 둥근 천장이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이다. 나무 루버 사이 유리 천장으로 빛이 새어 들어온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벨트는 성당 곳곳에 풍부한 표정을 만든다. 보타는 “어느 자리든 상관없이 모든 신도들을 자연광으로 따뜻하게 감싸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그의 바람처럼 빛은 계속 움직이며 방문객들에게 선물처럼 다가온다. 빛은 공간을 안온함과 평화로 가득 채운다.
성당 내부의 양쪽 벽에는 8개의 작은 채플이 있다. 홀로 조용히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공간이다. 신자석은 내부 공간에 가지런하면서도 간결하게 놓여 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완만한 경사의 대성당 바닥에 맞춰 각도를 조금씩 달리한 것을 알 수 있다. 보타의 섬세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의자를 비롯해 성당의 제대, 성수대, 성물함 등 모든 것들은 보타의 손을 거쳤다.

맨 앞 신자석에 앉아 본다. 십자가와 성화 뒤편의 붉은 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완벽한 대칭과 기하학적 질서 속에서 변화와 리듬감이 느껴진다. 성당 외벽과 내벽 대부분을 붉은 벽돌로 채우면서도 조적 방식을 달리하여 율동과 생동감을 더한 것이다. 벽돌로 쌓아 올린 견고한 탑의 천장은 반원형 유리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리 천장을 통해 벽돌 기둥에 쏟아지는 빛의 그림자는 천사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천사가 날개를 드리우며 잠시 머물다 가는 듯한 장면은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천창에서 쏟아지는 강한 빛은 하늘로부터 가져와 건축에 바치는 오마주이며 붉은 벽돌을 진동시키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표현한 보타의 말이 떠오른다.


(좌) 나무 루버 틈을 따라 내부로 스며든 빛은 시간에 따라 움직이며 방문객들에게 안온함과 평화를 느끼게 한다.
(우) 탑의 천창에서 쏟아지는 빛은 신비로운 천사의 그림에 성스러움을 더한다.
시간이 고이는 위로의 공간

성당 출입문을 열고 나가면 뒤편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문이 있다. 성당의 뒷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외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이 성당이 땅속에 반쯤 묻혀 있음을 알게 된다. 거대한 앞모습과 달리 뒷모습은 대지를 품어 안은 듯한 나지막하고 겸손한 모습이다. 탁 트인 풍경을 한동안 바라본다. 발아래로 펼쳐진 성지의 모습은 이상각 신부의 35년의 헌신과 그 비전에 동참한 보타 그리고 성지를 한마음으로 일군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어떻게 한 공간을 변화시킬 수 있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건축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땅의 역사와 영혼을 공간 속에 새겨 넣는 예술이다. 순교자의 아픔이 스며든 땅 위에 피어난 대성당의 붉은 벽돌, 사계절의 변화를 담은 푸른 정원, 공간 곳곳에 스며든 예술 작품들은 서로 어울려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며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시간이 고이고 빛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넘실거리는 이 공간에서 위로를 얻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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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님의 댓글
우리나라에 이런 멋진 건축물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요! 하나의 예술 작품. 마스터 피스와 같은 이 곳을 어서 방문해 보고 싶어요. 왠지 저를 토닥여 줄 것 같아요 T 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