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서양 미학의 전통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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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허나영(시각장연구소 대표·예술학 박사)
| 에디터 황유진
인류는 아름다운 풍경, 예쁜 꽃과 과일, 역사적 위인의 모습을 예술 작품 속에 담아 왔다. 비록 과거의 모습이지만 마치 지금이라도 숨 쉴 듯 생생한 모습이 담긴 그림들을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언제부터 이러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1세기 고대 로마의 도시였던 폼페이의 유적에서도 입체감이 있는 그림이 발견되긴 하였지만, 아쉽게도 곧 도래한 기독교의 시대에서는 그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이후 사실적인 표현은 거의 천년 가까이 암흑 속에 갇혀 있다가 르네상스(Renaissance)의 수학적 사고 위에서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20세기 들어 중세 문화의 우수성이 재평가되었지만, 한 시대의 문을 닫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르네상스인들에게 중세는 극복해야 할 시간이었다. 비록 기독교적 관습을 타파할 수는 없었지만, 르네상스인들은 그간 억눌려 있던 인간성과 인간의 문화를 되살리고 싶어 했다.
상상력을 조금 더해 보자면, 마치 엄격한 부모 아래에서 순종적으로 자라던 아이가 자신의 성향과 욕구를 깨달으며 정체성을 세워 가는 모습과 닮아 있다. 그래도 부모의 영향을 벗어날 수 없기에, 르네상스인들은 기독교적 신념과 관습은 그대로 따르면서도 새로운 방식을 모색했다.
이들은 이미 오랫동안 잊혀서 종교성을 잃어버린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를 되살리면서도 이를 기독교에 맞게 변형시켰다. 신이 가장 사랑하는 피조물이 인간이라면, 인간의 창조물 역시 신의 가치를 드높이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사고의 등장이었다. 그러면서 르네상스인들은 세상을 신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방식 중 하나가 바로 수학과 과학적 관점이었다.
“원근법아, 너 참 사랑스럽구나!”, 우첼로
황금색 후광으로 번쩍이는 신의 광휘를 보여 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인간이 사는 공간에 신이 나타난 듯한 환영(illusion)을 보여 준다면 얼마나 더 생생하겠는가. 우리가 굳이 불편한 AR 기기를 쓰고서라도 가상 현실을 경험할 때, 분명 실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생생한 경험을 경이롭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전깃불이 없던 시절,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벽에 그려진 마사초(Masaccio, 1401~1428/이탈리아)의 <성 삼위일체>를 보았을 때, 많은 신자가 눈앞에 예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하느님이 현현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평면에 3차원의 현실감을 만들어 내는 일이 과연 타고난 예술적 재능만으로 가능할까?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는 분명히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영역이다. 게다가 중세를 지나며 그러한 훈련의 맥이 끊겼기에, 화가들은 스스로 그 방식을 찾아야 했다. 그중 매우 열정적인 작가가 있었다. 바로 우첼로(Uccello, Paolo/1397~1475/이탈리아)다.
우첼로(Uccello, Paolo/1397~1475/이탈리아) 산 로마노 전투(나무 패널에 템페라와 유채/183X320cm/1438~1440년)
우첼로는 “원근법아, 너 참 사랑스럽구나!”라며 원근법에 대한 사랑을 직설적으로 고백할 정도로 ‘원근법 마니아’였다. 그는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가는 원근법에 몰두하였고 이를 작품 속에 구현해 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메디치가의 주문으로 제작된 <산 로마노 전투>이다. 총 3점의 연작으로, 그중 위 패널은 1432년 산 로마노 전투에서 용병대장이 피렌체 군을 이끌고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화면 중앙의 백마 탄 용병대장 뒤로 기세등등한 피렌체 군이 몰려오고 있고, 그 앞쪽에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이미 죽은 적군들은 바닥에 누워 있다. 분명 이 장면은 매우 역동적이며 격렬한 전투의 한복판이다. 하지만 왠지 이상하지 않은가. 그림 속 인물들은 마치 멈춰선 회전목마처럼 다들 얼어붙어 있는 듯하다.
우첼로는 분명 이 작품에서 자신이 연구한 원근법을 철저히 구현했다. 전경과 원경의 크기에 차이를 두었고, 바닥에 뒹구는 적군과 창, 투구와 방패 등을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일정한 기울기로 ‘잘’ 배치하였다. 그렇지만 이처럼 완전한 원근법적 표현에 집중한 나머지, 우첼로는 역동적 움직임과 사실적 표현은 등한시하였다. 그는 자연을 두 눈으로 직접 관찰한 모습보다 원근법 그 자체를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마치 수학자처럼 말이다.
원근법이라는 시각적 질서의 완성
르네상스 4대가 중 한 명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이탈리아) 역시 자신을 수학자로 여겼다. 오늘날 천재 화가를 넘어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는 다 빈치는, 실제 자신을 일반적인 예술가가 아니라 ‘수준 높은’ 수학자 혹은 과학자로 인식되길 바랐다.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예술가보다 학자의 지위를 더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폭넓은 과학적 연구를 천재적으로 수행한 인물이었다. 이른바 ‘다 빈치 코덱스’라 불리는 그의 친필 노트에는 다양한 발명 아이디어는 물론, 자연과 인간 신체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탐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다 빈치는 바로 그 과학적 태도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렸다. 다 빈치의 대표작 중 하나인 <최후의 만찬>도 이러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예수는 12명의 제자와 함께한 마지막 만찬에서 자신이 곧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예언한다.
<최후의 만찬>은 이렇듯 중대한 사건을 우리 눈앞에 ‘현실과 같은 환영’으로 펼쳐 놓는다. 당시 이 작품의 제막식에 참석한 바사리(Vasari, Giorgio/1511~1574/이탈리아)는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모든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해서 실제 최후의 만찬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현실감 넘치는 표현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원근법’이었다. 그것은 우첼로의 방식보다 수학적으로 더욱 엄격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원근법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이탈리아) 최후의 만찬(혼합 매체/460X880cm/1495~1498년)
오늘날 우리는 컴퓨터나 인공지능으로 3차원 입체처럼 보이는 평면 이미지를 손쉽게 구현할 수 있다. 하나의 소실점을 설정한 뒤, 이를 향해 일정한 비율로 사물의 크기와 기울기를 줄여 나가면 입체감 있는 장면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방법이 <최후의 만찬>에도 적용되어 있다. 천장과 벽면의 사선을 따라 선을 그으면 모든 선이 하나의 점 즉 소실점으로 모인다. 그리고 그 소실점은 바로 예수의 머리에 위치한다. 그렇기에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화면의 중심인 예수의 얼굴에 주목하게 된다. 더불어 예수 뒤쪽 창문을 통한 빛과 그 위의 둥근 장식은 후광과도 같은 빛의 효과를 자아낸다.
다 빈치의 노트에는 원근법이라는 시각적 질서에 대한 탐구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근법으로 인해 그는 회화 속에 눈앞의 현실처럼 생생한 공간을 재현할 수 있었다. 물론 마사초나 우첼로와 같은 선배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다 빈치에 와서야 비로소 완전한 수학적 원근법의 공식이 완성된 것이다.
다 빈치는 대상이 멀어질수록 형태가 선명하지 않고 색이 흐려지는 현상, 즉 ‘대기 원근법’도 처음으로 그림에 적용했다. 우리에게 ‘모나리자’로 알려져 있는 <라 지오콘다>는 그 주인공만큼이나 배경도 의미가 크다. 다 빈치가 ‘대기 원근법’을 자신만의 기법인 ‘스푸마토’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공기의 영향으로 거리가 멀어질수록 색이 흐려진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기독교적 사상 속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신이 창조한 세상은 완벽하기 때문에 왜곡이나 흐림 같은 현상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인간의 눈으로 본 것을 확실한 증거로 받아들이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다 빈치의 시각은 과학적 사실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다 빈치가 완성한 원근법은 이후 다른 화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서양 회화의 기본이 되었다. 나아가 이러한 시각 체계는 오늘날 카메라에서 사용되는 기계적 원근법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이탈리아) 동방박사의 경배를 위한 원근 연구(종이에 잉크/16.3X29cm/1481년)
시메트리(symmetry)의 미학
‘르네상스 원근법’과 함께 이 시기에는 서양 미학 전통의 뼈대가 되는 ‘대이론(The Great Theory)’이 확립되었다. 앞서 본 <최후의 만찬>을 포함하여 당시에 제작된 많은 회화, 조각, 건축이 대이론의 미학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부터 강조되었던 ‘심메트리아(συμμετρία, symmetria)’에서 연원한 것이다.
조화로운 비례와 균형을 의미하는 심메트리아는 아름다움이란 전체와 부분 그리고 부분들 간의 비례가 수적으로 이상적인 상호 관계 속에 존재한다는 미의 법칙이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 건축에서 보이는 기둥의 수와 크기 및 배열, 조각에서 보이는 균형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된 논의는 고대 로마의 건축가인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10서(De Architectura)》 (BC 30-20년경)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비트루비우스는 인체의 비례를 건축에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인체가 전체와 부분 간의 비례로 구성된 것처럼, 건축도 그런 수학적 구조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비트루비우스는 인체의 길이와 비례를 수학적으로 분석했다. 그가 제시한 인체 비례는 공학적인 용도였기에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는 것을 전제로 하였다. 이러한 개념에 바탕을 둔 고대의 심메트리아를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새롭게 되살린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 빈치의 <비트루비우스 맨>은 바로 비트루비우스의 《건축 10서(De Architectura)》에 기술된 인체 모델을 시각적으로 새롭게 구현한 것이다.
다 빈치는 인체의 비례에 대한 아이디어를 과거의 선배에게 따온 것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 빈치는 사람의 키와 양팔을 벌렸을 때의 길이가 같은 것을 이상적인 인체 비례라 생각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이탈리아)
비트루비우스 맨(종이에 은첨필/34.4X24.5cm/1490년경)
인체는 배꼽이 그 중심이어서 사람이 손과 발을 펴고 드러누웠을 때 컴퍼스의 선단을 배꼽에 놓고서 원을 그리면 손과 발끝이 그 원주에 닿는다. 인체에서는 원뿐만 아니라 사각의 도형도 설정해 볼 수 있는데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재고 그 거리를 양손을 펼친 상태에서 옮겨 보면 같은 폭과 높이를 가진 정방형임을 알 수 있다.
- 《건축 10서(De Architectura)》 제3권
더불어 이상적인 비례를 가진 인간은 좌우가 동일한 ‘시메트리(symmetry)’의 균형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좌우의 동일한 비례는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에서 가운데에 예수를 배치하고 양쪽에 동일하게 6명씩 제자를 앉힌 점과도 연결된다. 이렇게 대칭의 균형을 맞추는 방식은 르네상스 건축에서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혹 로마나 피렌체 등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건축을 찾고자 한다면 건물의 정면 즉 파사드를 보면 된다. 르네상스 건축의 파사드는 마치 종이로 접은 듯 좌우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인문학자이자 건축가였던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는 1435년 자신의 저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조화와 훌륭한 비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 규정했다.

이렇듯 르네상스 시대에는 생활의 모든 면에서 완벽한 비례의 법칙, 즉 그리스어 카논(κανών)에서 유래한 캐논(cannon)을 따라야 ‘미(美)’로 인정받았다. 르네상스인들은 단순히 고대 문화를 되살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의 법칙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이는 그저 직관이나 경험이 아닌, 수학과 과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한 합리적 근거를 가진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확립된 미의 캐논은 오랜 미술의 역사 속에서 창의적인 작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전통적 법칙만을 따라서는 앞선 화가들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후 화가들은 이를 변형하며 미의 개념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렇지만 분명 르네상스기 수많은 예술가의 노력과 실험의 산물로 확립된 법칙은 지금도 유효하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파사드(대리석/이탈리아/1456년~14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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