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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사이, 허스트가 남긴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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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6.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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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미언 허스트’ 특집 두 번째 이야기,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시 리뷰







| 글  윤미리(삼각산고등학교 교사)

| 사진  김형국 · 국립현대미술관(제공)
| 에디터  김형국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은 쉽게 설명되지 않는 감각을 남긴다. 포름알데히드 속 동물, 다이아몬드로 뒤덮인 해골, 차갑게 빛나는 약장과 거대한 유리 진열장들은 낯설고 섬뜩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우리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잡아 둔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작품들이지만 이들은 하나의 질문을 응시한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그리고 예술은 그 불안과 욕망을 어떤 이미지로 우리 앞에 되돌려 놓는가.’

허스트는 이 질문을 아름답고도 불편한 방식으로 밀어붙이며, 예술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삼각산고등학교 미술 교사 윤미리 선생님은 이번 전시를 따라가며, 동시대 미술의 논쟁적 장면을 만들어 온 허스트의 작품들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다시 들여다본다. 

eb953b1fe64063503d7f9da52f056a8b_1784098739_45.jpgInstallation view, Damien Hirst: Nothing Is True But Everything Is Possible(2026),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Ltd.©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철저히 작품으로만 

말한다는 미술계의 악동

2026년, 국내 미술계가 가장 주목한 전시 중 하나가 바로 국립현대미술관의 《데이미언 허스트: 진실은 없어 그러나 모든 것은 가능하지》 전일 것이다. (최근 국립국어원 표기법에 따라 ‘데미안’이나 ‘데미언’이 아닌 ‘데이미언 허스트’로 공식 통일되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데이미언 허스트(Hirst, Damien/1965~/영국)는 영국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다. 그는 영국의 권위 있는 현대 미술 전문지 《아트리뷰ArtReview)》가 매년 선정하는 ‘아트리뷰 파워 100(ArtReview Power 100)’에서 2005년과 2008년 두 차례 세계 미술계 영향력 1위에 오르며, 동시대 미술계를 움직이는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3월 18일, 정식 개관 전 비공식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필자는 《더 레이어》 교사 기자단 자격으로 그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PRESS 입장 카드가 낯설면서도 묘한 설렘을 안겨 주었다. 

허스트는 행사 시작 시간에 맞춰 스탭들과 모습을 드러냈다. 편안한 복장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대표작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를 모티프로 디자인한 의상이다. 작가는 짧은 인사말로 간담회를 시작했다. 그는 이번이 네 번째 한국 방문이라고 하며, 아시아 최초로 한국에서 자신의 전시를 열게 된 것에 대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어 직접 전시장을 둘러봤다며, 전시가 매우 ‘경제적(economical)’으로 설치되었다고 말했다. 그 표현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공간을 합리적이고 영리하게 활용했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가 되었다. 

“질의응답은 받지 않습니다. 저는 작품으로 이야기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허스트는 이 짧은 한마디로 간담회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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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데이미언 허스트, 
과연 그는 어떤 작가일까? 
데이미언 허스트는 현대 미술계의 판도를 바꾼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YBA, Young British Artists)’의 대표 주자다. 1970년대 영국의 경제 침체와 1979년 마거릿 대처 정부의 강력한 긴축 정책은 예술 기금의 대폭적인 삭감으로 이어졌다. 꽁꽁 얼어붙은 미술 시장 속에서 젊은 예술가들은 스스로 생존 방식을 모색해야만 했고, 그 과정에서 사회 저항적인 성격을 띤 YBA 그룹이 탄생했다. 물론 세월이 흐른 지금, 이 멤버들은 더 이상 이름처럼 'Young'한 작가들이 아니다. 이제는 오히려 ‘거장’이라는 표현이 더 자연스럽다. 한 시대의 반항아였던 이들은 오늘날 각자의 영역에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동시대 미술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허스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단연 ‘죽음’이다. 부모님의 이혼 속에서 외롭고 불안한 사춘기를 보낸 허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늘 죽음을 떠올렸다. 십대 
시절에는 시체나 동물의 해부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어머니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의지했던 가톨릭 신앙 안에서도 그는 신에 대한 경건함보다는 성화와 도상, 성경 속에 등장하는 피와 육체의 이미지에 더 강하게 매료되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가 죽음이라는 오래된 예술의 주제를 자신만의 기괴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살아있는 자로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절단된 동물의 사체나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은 관람객에게 강렬한 시각적·심리적 충격을 안겨 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서늘한 공포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생명의 유한성과 소중함’이라는 가치다. 

서울박스, 수직의 

공간이 여는 서막

전시실 입장을 기다리는 지하 1층 로비, 전시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작품이 놓인 곳은 거대한 볼륨을 가진 보이드(Void) 공간, 이른바 ‘서울박스’다. 

옛 국군기무사령부 건물에 현대적 건축을 결합시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기존 건물을 활용해야 하는 조건과 바로 옆 경복궁으로 인해 층고를 높일 수 없었던 한계를 지하 공간의 확장으로 풀어냈다. 

자칫 폐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지하 공간이지만, 수직으로 뚫어 낸 중정과 높은 층고 덕분에 개방감이 탁월하다. 지상 1층의 유리창과 천창을 통해 쏟아지는 자연광이 지하 1층 깊숙한 곳까지 환하게 도달하기 때문이다.

서울박스 중앙에는 영웅의 기마상처럼 거대한 말 조형물 〈신화〉가 높은 전시대 위에 서 있다. 

한쪽 면은 유려하고 아름다운 백마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반대쪽은 피부가 벗겨져 붉은 근육과 골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모습이다. 




서울박스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 <신화>와

거대한 크기의 <스팟 페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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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배경으로 미술관 인테리어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크기의 〈스팟(Spot) 페인팅〉이 자리하고 있다. 

허스트의 스팟 페인팅은 초기의 빽빽하고 무질서한 형태에서 점차 규칙적인 간격을 두는 연작으로 발전했으며, 그의 ‘알약 연작’과 함께 반복, 배열, 강박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이곳의 스팟 페인팅 역시 거대한 벽면을 일정한 간격의 색점들로 채우고 있다. 단순한 반복 패턴 같지만 수많은 원 중 같은 색은 단 하나도 없다. 작가가 색상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지정하고, 미술관 직원들이 직접 채색에 참여해 완성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다. 다만 아쉽게도 전시가 끝나면 원래 흰색 벽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빙글빙글 세 줄로 이어지는 대기 줄을 따라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주변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서야 중앙의 말 조형물과 벽면의 스팟 페인팅이 전시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관람객은 그 순간부터 곧 펼쳐질 허스트의 작품 세계에 기대감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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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1 - 모든 질문에는 의심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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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Damien Hirst: Nothing Is True But Everything Is Possible(2026),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Ltd.©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첫 번째 전시실, 허스트의 초기작들로 채워져 있다. 훗날 영국 현대 미술을 발칵 뒤집어 놓게 될 그의 악동 기질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그는 우리가 근대 사회 이후 당연하게 믿어 온 질서와 규범에 의문을 제기한다. 

작품 제목들 또한 무척 철학적이다. 〈올라간 것은 반드시 내려온다〉, 〈사랑의 취약성〉, 〈너는 나를 피하고, 나는 너를 피한다〉 등이 그렇다. 

미술 대학 시절, “회화는 벽에 걸고 조각은 바닥에 두라.”라는 교수의 말에 반발해 그는 바닥에 싸구려 합판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렸고, 조각은 벽에 매달았다.

전시실 한편에 걸린 문제적 사진 작품 〈죽은 자의 머리와 함께〉는 그가 평생 탐구할 주제, 곧 ‘죽음’의 출발점처럼 보인다. 

이 사진에는 영안실에 놓인 시체의 머리 옆에서 기괴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젊은 허스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사진 속의 당돌한 미소와 달리, 당시 그는 극심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고 한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지어낸 과장된 웃음은 역설적으로 그가 삶의 유한성과 죽음의 경계에 얼마나 깊이 매료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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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팟 페인팅(합판에 가정용 유광 페인트/243.8X365.8cm/1986년)

또 다른 작품 〈논리가 무너질 때〉 역시 죽음을 상징이나 은유로 우회하지 않고, 그것을 눈앞에 적나라하게 제시하며 관람객에게 불편함과 긴장을 강요한다.

사고로 훼손된 시신의 머리 사진과 함께 배치된 의료 기구들은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과 허무를 증언하는 듯하다. 

그밖에도 전시장에는 허스트의 대표적인 초기 연작들이 함께 소개된다. 

버려진 사물들을 재조합한 콜라주 작업에서는 이후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게 될 수집과 배열의 감각이 드러나고, 〈스팟 페인팅〉과 〈스핀 페인팅〉에서는 통제와 우연 사이를 오가는 허스트 특유의 조형 언어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버려진 사물을 재배열해 만든 초기 콜라주로,

허스트 예술 세계의 출발점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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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CTION 2 -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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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Damien Hirst: Nothing Is True But Everything Is Possible(2026),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Ltd.©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1부 전시실이 허스트의 초기작들로 가득 차 있었다면, 2부 전시실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띤다. 넓은 공간에 거대한 유리 진열장으로 된 대형 설치 작품 셋만 놓여 있다. 이 공간은 박제된 상어, 썩어 가는 소머리와 파리, 그리고 인간을 상징하는 책상 구조물을 통해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와 동일하게 순환적인 삶과 죽음의 구조 속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준다.



허스트는 삶과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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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공포를 박제하다,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현대 미술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온 문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작품이다. 작가는 어릴 적 영화 《죠스》에서 느꼈던 공포를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죽은 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으로 채운 거대한 유리 수조 안에 넣어 전시했다. 

이 작품은 여러 층위의 논쟁을 낳았다. 애초에 영구 보존을 목적으로 포름알데히드 용액을 사용했음에도 상어는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부패했다. 결국 같은 종의 상어를 새로 포획해 교체하였다. 이는 곧 “교체된 상어도 원작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살아 있는 동물을 예술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생명 윤리적 비판도 피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점은 새로운 상어로 교체했음에도 작가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떠올렸던 1991년을 제작 연도로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물보다 아이디어의 탄생이 더 중요하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다. 

작품의 설치 과정 자체도 하나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가깝다. 압도적인 무게와 크기 탓에 수조와 상어, 그리고 특수 용액을 각각 분리해 운반한 뒤 현장에서 조립해야 한다. 포름알데히드 유출 위험이 큰 만큼, 사전에 증류수를 채워 수조의 누수 여부를 철저히 확인한 후에 포름알데히드를 주입한다. 상어 역시 포름알데히드를 채운 크레이트에 담긴 채 운반되며, 이를 다시 본 수조로 옮기는 짧은 순간에도 공기 노출로 인한 부패를 막기 위해 전문적인 관리가 이루어진다. 이번 전시가 어떻게 ‘아시아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는지, 그 엄청난 물리적 난이도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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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유리, 채색된 철, 실리콘, 모노필라멘트, 상어, 포름알데히드 수용액/217X542X180cm/1991년)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과 삶의 순환, 
〈천년〉

허스트의 기괴한 작품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것은 〈천년〉이다. 커다란 유리 진열장 안에는 썩어 가는 소머리가 놓여 있고, 그 위로는 살충기가 매달려 있다. 분리된 공간에서 부화한 파리들은 피가 흐르는 소머리를 향해 이동하지만, 그 과정에서 살충기에 걸리면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유리 진열장 안에서는 파리가 죽은 소머리를 먹고 알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이 구더기가 되었다가 다시 파리로 부화하는 생태계가 펼쳐진다. 작가는 본인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천년〉을 아낀다고 밝혔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러한 ‘통제할 수 없는 우연성’ 때문이다. 다른 작품들도 죽은 동물을 다루긴 하지만, 이 작품은 썩어 가는 소머리를 그대로 방치한 채로 현재 진행형의 죽음과 삶의 순환 구조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살아 있는 생물을 전시하는 과정은 대단히 까다롭다. 매뉴얼에 지정된 외래종 파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생태계 교란이나 바이러스 유출을 막기 위한 완전 밀폐 공간 조성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별도의 업체가 파리만 전문적으로 관리한다. 유리관 내부가 지나치게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청소와 파리 교체 작업을 진행한다. 병해충 확산 방지를 위해 이 모든 과정은 검역관의 철저한 입회하에 이루어진다.
몇 주 뒤 아이와 함께 전시장을 다시 찾았을 때, 아주 묘한 상황을 마주했다. 아직 새로운 파리가 부화하지 않아 유리관 안에 소머리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을 이 낯선 장면은, 역설적이게도 이 작품이 작가의 말대로 ‘통제 불가능한 전시’임을 완벽하게 증명해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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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유리, 철, 실리콘 고무, 채색된 MDF, 전기 해충 퇴치기, 소머리, 피, 파리, 구더기, 금속 접시, 솜, 설탕, 물/207.5X400X215cm/1990년)


유리 상자 속 우리들의 자화상, 
〈학습된 탈출 불가능성〉

필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다. 〈천년〉처럼 두 공간으로 분리된 유리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한쪽에는 새하얀 책상과 의자가 있고, 책상 위에는 담배, 라이터, 재떨이가 놓여 있다. 
몹시 좁은 반대쪽 공간은 완전히 비어 있다. 이 폐쇄된 공간은 반복되는 현대인의 무료한 생활을, 담배가 타 들어가며 재가 되는 과정은 잠깐의 쾌락이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우리의 인생을 닮아 있다. 
유리 상자 속 책상과 의자는 ‘인간’을 상징한다. 박제된 상어나 소머리, 파리처럼, 인간 역시 이들과 동일하게 삶과 죽음의 순환 구조 속에 갇혀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씁쓸함이 밀려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좁은 교실에 갇혀 반복되는 일상을 견디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청소년 흡연 예방 교육에 이 작품이 쓰이면 좋겠다는, 조금은 현실적인 생각도 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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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된 탈출 불가능성(유리, 스틸, 실리콘 고무, 포마이카, 섬유판, 의자, 재떨이, 라이터와 담배/213.4X304.8X213.4cm/1991년)

SECTION 3 - 침묵의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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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Damien Hirst: Nothing Is True But Everything Is Possible(2026),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Ltd.©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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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 불가능한 죽음을 보여 주던 2부를 지나 3부에 이르면, 허스트는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3부의 작품들은 과학과 종교, 그리고 예술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허스트는 약에 의존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일종의 종교적 맹신을 떠올렸다. 

약이 병을 치유할 것이라는 현대 의학에 대한 믿음과 신을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종교적 신앙이 결국 같은 구조를 가진다고 본 것이다. 허스트는 이런 믿음의 바탕에 있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시각화하였다. 

3부 전시실은 세 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첫 번째 영역은 밝고 넓은 공간이다. 약장과 의료 도구들이 놓인 이곳은 차가운 과학실을 연상시킨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강박적으로 배열된 의료 기구와 물고기 표본, 인체 모형 등이 놓여 있다. 생명을 연장시키는 도구들과 이미 죽어 박제가 된 표본들이 한 공간안에서 묘한 긴장을 만들어 낸다.

전시장 중앙의 가벽 뒤로 들어서면 분위기는 급격히 달라진다. 어둡고 경건한 두 번째 공간의 중심에는 백금 두개골을 8,601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가 놓여 있다. 사진으로는 수도 없이 보아 온 작품이지만, 어두운 조명 속에서 실물이 뿜어내는 광채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압도적이다. 눈부신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곧바로 설명하기 어려운 서늘한 감각이 뒤따른다. 

허스트는 실제 인간 해골을 본떠 백금으로 주조한 뒤 다이아몬드로 촘촘히 장식했다. 그는 멕시코의 ‘죽은 자의 날(Día de Muertos)’ 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해골의 실제 치아 일부는 그대로 남겨 두었다. 화려한 보석 사이로 드러난 실제 치아는 작품에 기묘한 현실감을 부여하며, 죽음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환기시킨다. 이 작품은 삶의 덧없음을 상기시키는 바니타스(Vanitas) 정물을 떠올리게 한다. 영원함과 욕망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가 죽음의 상징인 해골과 결합하면서, 인간 욕망의 허망함과 삶의 유한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해골 뒤편에는 거대한 삼면 제단화 형식의 〈신의 무한한 권능과 영광을 묵상하며〉가 설치되어 있다. 멀리서 보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시키는 장엄한 작품이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시야는 수많은 나비의 사체들로 채워진다. 전통적으로 영혼과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나비가 이 작품에서는 거대한 죽음의 제단을 구성하는 재료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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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면 제단화 양옆에는 〈천사의 해부학〉과 〈성 바르톨로메오, 극심한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 언뜻 보면 르네상스 조각이나 가톨릭 성인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체의 표면이 벗겨진 채 내부 근육과 조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진 채 순교한 성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의 피부를 손에 들고 있는데, 이는 육체의 표면을 제거해 내부의 진실을 드러내려는 허스트 특유의 시선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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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 벽면 끝의 좁은 통로를 지나면 카페처럼 환한 세 번째 공간이 등장한다. 이곳에는 ‘약국(Pharmacy)’이 재현되어 있다. 1998년 런던에서 허스트가 직접 운영했던 동명의 약국 콘셉트 레스토랑을 재현한 곳이다. ‘현대인의 종교는 결국 약’이라고 역설하는 허스트는, 신을 향한 맹목적 믿음이 오늘날 의학과 약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지는 현실을 전시실의 공간 구성을 통해 직관적으로 보여 준다. 관람객들은 갑작스레 등장한 이질적 공간에 잠시 당황하면서도, 편안한 좌석이 놓인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이때 시선은 자연스럽게 약국 중앙의 조형물로 향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세 층으로 겹겹이 매달린 인체 전신 골격 모형이다. 밝고 비비드한 컬러의 알약들로 가득 찬 공간 한가운데, 죽음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뼈 모형이 매달린 풍경은 다시 한번 서늘하고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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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스튜디오: 진행 중인 작업들

마지막 전시 공간인 작가의 스튜디오는 다른 전시실과 떨어져 있다. 전시실을 나와 한 층을 올라간 다음, 복도를 지나 다시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다소 불편하고 복잡한 동선은 관람객이 갤러리를 벗어나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로비의 거대한 볼륨과 대비되는 좁고 낮은 천장의 작업실은 꼭대기층 다락방 같은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런던 템즈 강변의 작가 스튜디오를 그대로 옮겨 온 이 공간은 바닥재까지 그대로 뜯어 와 연출했다고 한다. 작업실을 옮겨 전시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허스트는 스튜디오 공간 배치를 직접 진행했고 그 결과에 큰 만족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 공간은 현재 진행형의 작업실이다. 전시 준비 기간에도 그는 거의 매일 이곳을 찾아 그림을 그렸다.
스튜디오에는 강렬한 물감 냄새가 배어 있다. 물감이 채 마르지 않아 관람객의 주의가 필요한 작품들, 로비에서 스팟 페인팅을 하고 남은 페인트 통, 마시다 만 테이크아웃 커피컵까지 그대로 놓여 있다. 마치 작가가 방금 전까지 이 공간에서 작업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한 생생함이 감돈다. 거울에는 작가가 한글로 직접 쓴 글귀, ‘사랑해요 대한민국’이 있다. 허스트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썼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스튜디오 입구에는 마티스 작품을 모작한 그림이 걸려 있다. 최근 허스트는 개념 미술적 작업에서 한발 물러나 마티스풍의 평온한 드로잉과 페인팅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근래에 큰 이슈를 만들지 못했던 그가 평범한 회화로 회귀하는 것은 결국 상업성을 의식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죽음과 공포, 욕망을 집요하게 응시하던 앞선 전시실과 달리, 그의 스튜디오에 놓인 최근 작업들은 마치 말년의 마티스를 떠올리게 할 만큼 평온하기만 하다. 
어쩌면 이 낯선 평화로움 역시 늘 논쟁의 중심에 섰던 악동이 보여 주는 또 다른 생존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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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tallation view, Damien Hirst: Nothing Is True But Everything Is Possible(2026),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Photographed by Prudence Cuming Associates Ltd.© Damien Hirst and Science Ltd. All rights reserved, DACS 2026.


이번 전시를 두고 ‘전성기 시절의 트로피적 작품들만 모아 놓았다.’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허스트의 유명세에 비해 국내에서 그의 원작을 직접 마주할 기회는 극히 드물다. 논란과 명성의 한가운데 있는 문제작들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전시가 지닌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데이미언 허스트라는 작가가 왜 오랫동안 동시대 미술의 중심에서 사랑과 비판을 동시에 받아 왔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전시장을 빠져나온 뒤에도 관람객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움과 공포, 삶과 죽음이 뒤섞인 그의 이미지들이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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