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SPECTRUM

미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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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식물을 그리면서 하루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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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6. 0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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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정원에서 쓴 

‘녹색손’ 임종길 선생님의 그림일기





작가 임종길은...

경기도에서 30여 년간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화가로도 활동했다. 초기에는 분단과 사회 부조리, 교육 현장의 현실 등을 주제로 한 민중 미술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숲과 습지, 식물과 생명의 순환에 주목하며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업으로 확장해 나갔다. 퇴직 후에는 제주로 거처를 옮기고, 정원과 식물, 일상의 풍경과 마음의 움직임을 그림일기의 형태로 기록하고 있다. 수원시립미술관,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등에서 다수의 전시를 하였다.

《두꺼비 논 이야기》, 《오늘 뭐했지?_제주 정원에서 쓴 녹색손 그림일기》 등을 지었고, 《콩알 하나에 무엇이 들었을까?》, 《가랑비 가랑가랑 가랑파 가랑가랑》 같은 어린이 책에 그림을 그렸다.




| 글·그림  (전 양지고등학교 교사)

| 사진  김형국

| 에디터  이진화

나는 개인주의자이자 소소한 쾌락주의자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주변의 아픔이나 불행을 외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도 행복할 수 없었으니까. 여기까지 들으면 목소리 큰 정치가나 혁명가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소심한 성격의 그림 그리는 작가이자 미술 교사였다.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말과 행동으로 맞서기보다, 그림을 통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전하고자 했다.


학기 초 첫 미술 시간은 늘 “미술을 잘하면 연애를 잘할 수 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다소 선정적이고 도발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 말에는 아이들이 미술을 통해 조금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또한 주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어른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30년의 시간을 돌아보면, 작가로서의 나보다 미술 교사로 살아온 내가 더 행복했고 또 좋았다.

생태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내 그림에는 녹색이 많아졌다. 그즈음부터 닉네임도 ‘녹색손’이 되었다. 학교를 떠나 제주에서 생활하고 있는 요즘은 오래전부터 게으르게 써 오던 그림일기를 조금 더 정성껏 쓰고 있다. 낙향한 문인처럼 내가 좋아하는 식물을 키우고 그리며, 마음속으로 들어온 생각들을 글로 적는다. 그래서인지 그림일기는 옛 문인화와도 닮아 있다.

그림일기를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얻은 것들이 있다. 무엇보다 주변을 이전보다 더 천천히 관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단지 보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의미까지 오래 들여다보게 된다. 살아가며 만나는 여러 일들을 천천히 생각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조금 더 충실해지는 느낌이다. 그리고 지난 그림일기를 다시 꺼내 읽는 재미도 꽤 크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잊혔을 슬픈 일, 기쁜 일, 무료했던 하루의 순간들이 다시 살아나 미소 짓게 만든다.
_ 녹색손, 임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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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거리 나무, 흔들리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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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쯤 듬직한 저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서 있을까.”


 

 

잡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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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심은 꽃들 중에는 들꽃도 많은데

어떤 녀석은 보호하고 어떤 녀석은 뽑아낸다.

큰 수레에 가득 풀을 뽑고 나니

내가 뽑은 풀 이름이라도 알아야 할 것 같아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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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미술 교사로 살아오시다가, 갑자기 퇴직을 하고 제주도로 내려오셨는데요, 이런 결정을 하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을까요?


사실 저는 51 대 49 정도로 창작보다 미술 수업을 더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교직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15년 정도는 정말 학교 가는 게 너무 즐거웠어요. 일요일 저녁이면 빨리 월요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죠. 학생들을 만나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심지어 ‘이 정도면 내가 월급을 받는 게 미안하다. 오히려 돈을 내고 학교에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다가 환경과 생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학교 안에서 여러 시도를 하기 시작했어요. 학교마다 연못도 만들고 정원도 만들고 온실도 꾸몄죠. 학교에 가면 가장 먼저 식물들을 둘러보는 게 일상이었어요. 물론 그런 걸 하려면 학교를 설득해야 했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온실에서 식물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데, 수업 들어가는 것보다 그 시간이 더 행복한 거예요. 그렇게 학생들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걸 좋아했던 사람인데도 말이죠. 그 순간 ‘아,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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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의 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사실은 제주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지금까지 살던 곳에서 조금은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수원에 있을 때도 학교만 다닌 게 아니라 시민 활동이나 환경 단체 활동 같은 걸 많이 했어요. 환경 단체 운영위원장도 하고, 지역과 연결된 여러 활동을 하면서 지냈죠.
그런데 늘 마음 한편에는 ‘등 떠밀리듯 살아간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해야 할 일도 많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과는 조금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언젠가는 조금 더 단순하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들을 중심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러려면 기존의 환경에서 한 번쯤은 벗어나야 했죠.
원래 제 고향은 지리산 쪽이에요. 사실 처가가 제주가 아니었다면 아마 지리산 근처로 내려갔을지도 몰라요. 저는 바다보다 산을 더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아내가 제주 사람이고, 또 제주라는 환경 자체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에 좋은 공간처럼 느껴졌어요. 지금은 이전보다 훨씬 천천히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맨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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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참 야무지지 못하다. 실수도 자주 하고.

그래도 운 좋게 꾸역꾸역 살고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덕분에 다른 사람의 실수도 웃음으로 바라볼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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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늘 흔들린다. 나도 나이가 들면서 자신을 낮춰 보려 
노력하는 것은 겸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 중심을 낮춰 흔들림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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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의 하루는 주로 어떻게 흘러가나요?


제가 워낙 식물을 좋아하다 보니 집을 짓기 전부터 나무를 하나둘씩 심기 시작했어요. 원래는 아무것도 없던 땅이었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정원을 둘러보는 거예요. 집 뒤쪽으로 산책하듯 한 바퀴 도는데, 이것저것 보다 보면 기본 40~50분은 금방 지나갑니다. 중간중간 풀도 뽑고, 새로 올라온 식물도 보고요. 아침에 온실도 한 번 둘러보고, 정원을 천천히 걸어 다니는 것이 제 하루의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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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만 봐도 제주 자연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이곳에서 주로 어떤 작업을 이어 가고 계신가요?


저는 기본적으로 민중 미술 계열에서 작업을 시작했던 사람입니다. 그림을 통해 사회에 어떤 이야기를 던지는 걸 좋아했죠. 그래서 초기에는 분단 문제나 독재, 사회 부조리 같은 주제를 많이 다뤘습니다.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환경과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제주에 내려와서는 작업 방식이 많이 달라졌는데요, 저는 요즘 작업을 “자연을 관찰하고 마음을 기록하는 그림일기”라고 표현하거든요. 지금 제 일상은 정원을 가꾸고, 그 안의 식물들을 관찰하고 그리는 시간에 가까워요.

저는 원래 식물에 관심이 많았어요. 이름도 많이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 시들해졌었어요. 식물을 너무 세세하게 구분하고 공부하다 보면 오히려 피곤해질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제주에 와 보니까 처음 보는 나무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말오줌나무, 먼나무, 실거리나무, 비쭉이나무… 이름도 얼마나 독특한지 몰라요. 대부분 육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식물들이죠.

제주 자연은 제게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다시 관찰하고 기록하고 싶게 만드는 감각의 세계인 것 같습니다.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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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잘 드는 작업실 한쪽에 콩깍지와 함께

말라 가던 비트를 잘라 봤다. 다른 세상이 숨어 있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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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행복이란 단어를 쓰는 순간

뭔가 틀에 가두는 것 같은데.

나는 그냥 평화로운 상태가 좋아.

참 좋은 단어야, ‘평화.’”

제주에서도 생태 교육 프로그램 활동을 이어 가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우연히 문화 기획을 하는 곳에서 연락이 왔어요. 생태 관찰 그림 프로그램을 한번 기획해 보지 않겠냐고요. 그렇게 시작한 프로그램이 벌써 4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10회 정도 진행했는데, 지금까지 거쳐 간 분들이 90명 가까이 돼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부분 그림도 자연도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제주에 내려와 그렇게 비슷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가 제게는 큰 행운처럼 느껴졌어요.

무엇보다 좋았던 건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도 관계가 계속 이어진다는 점이에요. 참여했던 분들이 동아리처럼 계속 모임을 이어 가요. 만나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거든요. 생각해 보면 이것도 미술 교육의 연장인 것 같아요. 장소가 학교 밖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여전히 사람들과 그림을 통해 만나고 있으니까요.


제주에서 활동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으셨나요?


그림일기를 그리고 식물을 관찰하는 시간이 저한테는 굉장히 행복한 일이거든요. 그래서 수업을 하는 이유도 비슷해요. ‘이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도 느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제일 커요. 보통 사람들은 식물을 그린다고 하면 부담부터 느끼잖아요. 저 역시 예전에는 그랬고요. 그런데 지금은 잘 그리는 것보다, 그리는 순간 자체가 너무 즐거워졌어요. 그래서 수업할 때도 일부러 어렵게 접근하지 않아요. 제 방식이 좀 독특한데요. (웃음) “드로잉 3시간이면 끝, 채색 3시간이면 끝.

그러면 나 정도는 그린다.” 이게 제 수업 콘셉트예요. 처음에는 다들 말도 안 된다고 하는데, 막상 끝날 때쯤이면 대부분 스스로 놀라면서 인정하죠.

작년에 정말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었어요. 어떤 수강생분이 수업 8회 차쯤 됐을 때 갑자기 저한테 그러는 거예요. “선생님, 이제 그림 그리는 게 고사리 뜯는 것만큼 좋아요.” 제주 사람들에게 고사리 뜯는 건 정말 큰 즐거움이거든요. (웃음) 그런데 나중에는 다시 와서 “이제는 고사리 뜯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게 더 좋아요.”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는데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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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교사라면 한 번쯤 개인 작업과 학교 일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창작을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수업과 학교 업무에 집중하다 보면 작업이 뒷전으로 밀리기 쉽지요. 미술 교사와 작가의 삶을 함께 살아오신 선생님께서는 이런 고민을 하는 후배 교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신가요?


미술 교사들 사이에 은근히 그런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수업만 하고 있으면 뭔가 평범하고 의미 없는 삶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틈틈이 개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말이죠. 마치 그래야 더 열심히 살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저 역시 개인전을 여러 번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저 또한 교육보다 작업을 조금 더 가치 있게 바라보는 시선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범대 시절에도 ‘좋은 미술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작가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정말 중요한 건 훌륭한 미술 교사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후배 교사들이 있다면, 그 부담감은 좀 내려놓아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물론 개인 작업을 하는 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미술 교사라면 반드시 창작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거나, 그래야 더 좋은

교사가 된다는 생각에는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오히려 학생들과 만나고, 좋은 수업을 만들고, 교육 현장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로 살아가는 삶과 교사로 살아가는 삶은 서로 연결될 수도 있지만,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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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 실린 그림일기 작품들은 《오늘 뭐했지?_제주 정원에서 쓴 녹색손 그림일기》 (건강미디어협동조합)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임종길 선생님의 인스타그램에서 더 많은 작품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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