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교육과 미술 교과 그리고 미술 교사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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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교육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우리는 오랜 시간 각자의 자리에서 미술 교육에 대해 고민해 온 두 사람의 목소리를 담았다.
그들의 시선을 통해 미술 교육, 미술 교과, 그리고 미술 교사를 다시금 바라본다.
| 에디터 황유진
아름다움을 아는 능력과
인간다움의 관계에 대하여
| 글 하영유(경상국립대학교 미술교육과 교수)
그리 오래 살지도, 그렇게 짧게 살지도 않았지만, 살아온 시간 안에 가장 많은 질문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교육의 역할에 대해, 교육자인 자신과 우리의 역할에 대해 회의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미술 교육의 역할에 대해, 미술 교육자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심한다.
교육은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성장하게 할 임무를 가지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차원에서는 그 인간다운 인간들이 서로를 돌보며 사람 살 만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교육자는 가진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다움’의 가장 큰 특징을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 했고, ‘사유’를 ‘자신과의 대화’라 했다. 다시 말해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다. 2022 개정 미술과 교육과정에서는 학습자 개개인이 미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의 능력을 키워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고, 이를 바탕으로 타인의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식하고 존중하여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교육의 방향성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미적 경험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 미적 판단력이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알고 말할 수 있는 능력.
칸트는 인간이 이 미적 판단력을 갖추지 못하면 이성과 지성이 교육을 통해 굳건해지더라도 인간다워질 수 없다고, 철학자로서의 긴 인생의 마지막에 용감하게 밝혔다.
이성과 지성을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제시했던 자기 사상의 두 기둥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판단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 다른 이의 그 판단에 귀 기울이고 함께 감탄하고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은, 칸트가 혼란과 폭력의 시대를 겪으며 필사적으로 찾았던 인간의 조건이었다.

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1724~1804)
다시 한번 미술 교육은, 이 시대에 우리가 밝혀내야 할 인간의 조건을 교육적으로 실현해 내는 역사적인 사명을 되찾아 실현해야 하는 때를 맞이하고 있는지 모른다. 경쟁을 통해 끊임없이 우열을 가려 ‘우’의 도장을 받은 이가 ‘열’로 이름 매겨진 이를 가치가 없는 듯 여겨도 되는 문화를 떨쳐 내고, 우리는 인간이므로 모두 동등하며 동시에 모두 다름으로서 고유하다는 진실을 미적 경험을 통해 사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우리가 실현해 보고자 하는 미적 경험이다.
미술 교육자의 이 아름답고도 힘겨운 역할은 인류에게 큰 비극이 왔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서로를 돌보며 더욱 인간다움을 찾아갈 수 있었던 햇볕과 단비이자 거름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경쟁과 획일성이 가장 안전한 선택으로 여겨질 때도 있는 학교 현장에서, 더욱 인간다운 세상을 일구기 위한 선생님들의 노력이 지금 그 찬란한 열매로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생명을 키우고 지키는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땀과 눈물이라 믿는다.
“교육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질 만큼 세계를 사랑할지를 결정하는 지점이다.”
미술 교과의 특별한 자리
| 글 김인규(전 서천고등학교 수석교사)
미술 교과는 다른 교과들에 비해 매우 독특한 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교육과정 편성에 있어서 교사의 자율성의 폭이 크다는 것이다. 연간 수업 계획을 세울 때 미술 교사에게 미술책은 하나의 참고 자료에 불과하다는 점이 그렇다. 대부분 교과 내용은 교과서를 바탕으로 구성한다. 더군다나 입시 교과의 경우는 거의 교과서에 붙박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어진 내용을 기계적으로 가르쳐야 하며 그만큼 가르치는 자의 즐거움이 감소될 수 있다.
미술 교과가 특별하게 교사의 재량권이 높은 배경에는 표현 활동이 중심에 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입시의 주요 교과가 아니라는 측면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든 간에 학교나 학부모, 학생이 크게 개의치 않는 경향이 있다. 일정하게 수량적으로 평가해야 할 지식도 요구하지 않다 보니, 딱히 이것은 가르쳐야 한다며 간섭하거나 개입하는 이가 없다. 미술 교사는 그만큼 자유로워지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미술 교사는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는 식의 시선도 있었다. ‘그려’ 이 딱 두 음절만 말하면 된다며 얼마나 쉬우냐고 진담이 섞인 농담이 회자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최근에는 교사들 사이에 ‘미술 교사를 하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 오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외부에서 미술 교과를 얼마나 편한 교과로 인식하고 있는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인문계 고등학교의 경우 미술 시간에 자습을 권장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내가 근무하던 시절이니 오래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말이다.
이런 점은 사실 미술 교사를 정말 힘들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뒤집어 보면 이는 미술 교과가 그만큼 무용한 교과로 여겨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미술은 예산 배정뿐 아니라 이런저런 교육적 배려에서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미술실이 아예 없거나 후미진 곳에 배정되고 별다른 지원도 되지 않던 것이 일반적이었다. 다른 교과에 비해 교사도 한두 명밖에 없거나 심지어는 미술 교사가 배치되지 않는 학교도 있으니 그만큼 목소리도 작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마저 그만큼 하찮게 여기고 조금만 힘들면 회피해 버리니, 무언가 열심히 가르치려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내신 성적이 입시에 반영되기 시작한 이후에 조금이나마 관심이 커지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미술 교육의 역사에서 주목할 점은 미술 교사들이 이런 환경에서 체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외면 당하는 만큼이나 교사 스스로 존재감을 가지려 애쓰고,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여러 활동으로 학교 활동에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다양한 실험과 도전을 통해서 미술 수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려 애썼고, 교과의 의미와 가치를 적극적으로 탐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지금부터 20~30여 년 전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한참 진행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형성된 미술 교육의 분위기였다. 패기가 넘치는 젊은 교사들이 다채롭고 창의적인 수업들을 추구하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즈음부터 미술 교과 활동의 내용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미술 교과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된 자율성이 오히려 미술 교사들에게는 자발적 도전의 계기가 된 것이다. 교육과정의 편성에서 미술 교과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것은 미술 교과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았다. 비슷한 환경과 여건에 있는 음악과 비교해 보면 그 점이 확인된다. 음악의 경우는 교과서가 가지는 지위가 여전히 강력하다. 이에 반해 어떤 미술 교사는 교과서를 거의 배제하고 수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나라 미술 교육이 가지는 역사와 맞물려 있다.
나는 미술 교과가 가지는 가장 주요한 특성이 이런 자유분방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토록 완고한 공교육 안에 이토록 자유분방한 교과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현대 미술이 가지는 실험적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런데 이런 미술 교사들의 실험과 도전은 역설적으로 학교 교육의 가치를 새롭게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김은비 외 5명, <몸으로 표현하기>, 천안오성고등학교, 2009
교육은 정해진 지식을 가르쳐 전수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 스스로 탐구하고 도전하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다. 이때 아이들은 교과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지식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한발 내디딜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인터넷이나 AI 등으로 지식을 손쉽게 제공받을 수 있는 오늘날, 창의적인 능력을 기르는 일은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른 여타 교과가 입시에 매몰되어 있던 상황에서 미술 교과가 교육의 역할을 새롭게 탐구해 온 셈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수업이 흥미롭지 못하면 아이들이 참여할 동기를 갖지 못하는 환경에서 미술 교사들이 열정과 노력으로 헤쳐 나온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교사들이 흥미롭고 새로운 수업 모형들을 개발해 냈고 서로서로 그것을 참조하여 수업을 바꿔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런 분위기를 형성해 가는 데 자발적인 교사학습공동체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급기야는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현장감 있는 교과서를 집필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은 또한 교육 현장의 문화를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학 교수들이 현직 교사 몇 명을 끼고 교과서를 집필하던 전통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교육의 주도권이 현장 교사에게 넘어온 것이다. 미술 교과가 가지는 독특한 문화가 그렇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흥미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부담은 한편으로는 가르치기 쉬우면서도 아이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형태의 수업에 치우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개 이러한 수업 모형은 교사에게 많은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런 수업을 몇 개 배치하면 한 학기를 쉽게 지낼 수도 있는 셈이다. 이런 수업은 달콤하기는 하지만 아이들의 성장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알 수 없다. 교사 스스로 교육적 가치와 의미를 탐구하지 않을 때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방과 후 활동의 수많은 체험 프로그램과 미술 교과 활동이 달라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입시에서 비중이 없다는 것이 교과가 가져야 하는 본래의 학습 과제마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의 성장기에 맞게 배움을 제공해야 하는 교과 고유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교과의 존재 의미와도 같은 것이다. 이에 우리는 그 가치와 의미를 끊임없이 탐구하며 그것을 어떻게 수업에 담아낼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어느 교과보다 자율권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교사의 책임과 역할이 크다는 것이기도 하다. 미술 교과의 생명이 미술 교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저 입시에 맞춰 수업하면 그만일 수 있는 교과와는 다른, 미술 교과만의 사명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미술 교과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실 모든 교육은 시험 점수를 높이는 것 이전에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성장을 지원해야 한다. 각 교과는 각자의 고유성을 통해 이를 추구해야 한다. 자율성을 지닌 미술 교과는 이와 같은 교육적 역할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러니 미술 교사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할 수 있는’ 자리가 맞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농담을 오히려 미술 교사에게 주어진 빛나는 계급장처럼 여긴다. 미술을 가르치는 일은 그만큼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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