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바로 미술 수업의 기적이 아닐까요?
페이지 정보
본문
미술 교사에게 오래도록 기억되는
아이들의 작품 이야기
미술 교사들은 매년 수많은 아이들의 작품을 만난다.
그중에는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 작품들이 있다.
뛰어난 기교 때문도, 완성도 때문도 아니다.
한 아이의 삶과 고민, 누군가를 향한 진심,
그리고 성장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교사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은 아이들 작품을 통해
미술 수업이 남기는 진짜 가치를 들여다본다.
| 글 허수정(하성중학교 교사)
최리나(상지여자고등학교 교사)
홍승아(문산중학교 교사)
박혜린(보람고등학교 교사)
정한솔(이리남중학교 교사)
| 에디터 이진화
돌아올 자리를
남겨 두는 일
| 글 허수정(하성중학교 교사)
제가 외부 강의를 나가거나 수업 나눔 사례 발표를 할 때, 꼭 잊지 않고 보여 드리는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은 2019년, 제가 교사 2년 차에 접어들던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죠.
당시 저는 이제 막 ‘신규’라는 딱지를 뗀, 2년 차 교사였습니다. 정신없이 보냈던 신규 1년을 지나, 2년 차 신학기에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신규 때 가르쳤던 2학년 학생들과 함께 3학년으로 올라가게 되었고, 그 안에는 바로 ‘그’ 학생도 있었어요.
‘그’ 학생은 2학년 때도, 3학년 때도 제가 담임을 맡았던 학생이었죠. 그 학생은 2학년 후반부터 학교에 나오는 것을 힘들어했어요. 당시에 학생은 등교에 대한 어려움을 호소했지만, 오랜 시간 상담을 해도 그 어려움의 근원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학부모님과 함께 “더 나은 3학년이 되기를 바란다.”라는 다짐을 나누는 정도로 상담을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3학년이 된 후, 한동안은 학교에 잘 나왔어요. 환경이 바뀌니 조금 괜찮아졌나 보다 생각했죠. 당시 저희 반의 분위기는 정말 좋았어요. 남학생, 여학생 간의 교류도 자연스러웠고, 아이들끼리 서로 잘 어울렸습니다. 학교 행사로 학급 단합 대회를 했던 날에는, 아이들이 밤이 늦도록 집에 가지 않으려 해 제가 진땀을 빼기도 했어요. 아이들은 담임에 대한 의리와 애정이 있었고, 저 또한 그런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지도했습니다.
마음이 먼저
그려지는 그림
| 글 최리나(상지여자고등학교 교사)
그림은 참 신기합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그림은 그 벽을 조용히 넘어서 가볍게 그 일을 해내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들이 어느새 그림 속으로 스며들곤 합니다.
가을빛이 물들던 어느 미술 시간, 저는 아이들에게 평소 소중하게 생각하는 책 한 권을 골라 보라고 했습니다. 좋아하는 문학 작품이나 소설, 시집 속에서 오래 마음에 남은 문장을 꺼내 그림으로 표현해 보는 수업이었죠. 주제는 “책 속 한 문장을 꺼내어 그림으로 상상하기”였습니다.
이 수업에서 제가 바랐던 것은 학생들이 이야기의 줄거리를 그림으로 단순히 재현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문장 속에서 떠오른 장면을 자기만의 언어로 번역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표현하며,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경험이었죠. 그래서 줄거리를 요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고, 인물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저 마음이 잠시 멈추었던 문장 하나, 읽는 순간 숨이 조금 느려졌던 문장 하나면 충분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마음을 색으로 바꾼다면 어떤 색일까?
“꿈을 꿀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에요.”
- 이미예, 《달러구트 꿈 백화점》 중에서
“꿈을 사고 꿈에 의해 치유받는 인물들에게 감정 이입이 됐어요. 사람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억이나 악몽 같은 순간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억지로 외면하고 떨쳐 내려 하기보다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우리가 더 단단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달러구트의 마지막 아홉 번째 에피소드를 읽는데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어요. 저도 언젠가는 할머니를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누고 싶어요. 꿈속에서라도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면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말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플 것 같지만, 그래도 꼭 한번 마주 보고 안부를 전하고 싶어요.”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라는 책을 선택한 학생의 말입니다. 저 역시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슬펐거나 후회로 남아 있던 기억들이 떠오르곤 합니다. 흐릿해진 기억 속에서 슬퍼하던 나를 다시 마주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였을까요. 그 아이가 아픔을 피하지 않고, 그 마음을 넘어 다시 안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제 마음 한쪽이 뭉클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는 곳, 그런 것인가 보더구나.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떠나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슬픔은 남지만 사랑도 함께 남는다. 만나서 반가웠다, 우리 강아지. 건강히 잘 지내고 사는 동안 꿈 많이 이루거라. 할머니는 오늘 너 봤으니 원하는 꿈을 다 이룬 셈이다.”

내 안의 길을 찾아가는 법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 신경림, 〈길〉 중에서
“요즘 고민이 많았어요.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어떤 직업을 가지면 행복해질지… 주변에서는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말하는데, 정작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서 결국 답은 제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학생은 시를 단순히 ‘길’에 대한 내용으로 읽지 않은 듯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시를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화면에 풀어냈다는 점이었죠.
작품의 오른쪽에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소녀가 있습니다. 회색과 짙은 남색이 섞인 길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습니다. 학생은 그 인물을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길만 따라가는 사람이지요.
반면 화면 중앙의 인물은 전혀 다릅니다. 같은 길 위에 서 있지만, 그 앞으로는 다른 색이 펼쳐져 있습니다. 노랑과 연두, 밝은 분홍빛이 섞인 화사한 색감이 화면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길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된 사람이에요. 안으로 난 길을 아는 사람이요.”

학생 작품,〈길〉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시의 한 구절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학생은 시의 메시지를 ‘내면의 행복’이라는 단어로 풀어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순리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결국 내면의 평화에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어둠과 빛, 낮은 명도와 높은 명도를 대비해서 표현했던 것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결국 길의 색을 바꾼다는 해석이었죠.
저는 그 그림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이해하는 순간부터 자신 앞에 놓인 길이 달라진다는 것을요.
우리는 종종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그날 이후 저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는 네 안의 길을 찾아가고 있니?”
그림 한 장이 교사의 질문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날 교실에서 저는 다시 배웠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책 한 권이 각자의 마음을 통과하면 저마다 다른 빛깔로 물든다는 것을요. 그리고 미술은 생각과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는 언어라는 것도요.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미술 수업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은 기적이 아닐까요?
미술 수업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정답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 마음속에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길을 조심스럽게 비추어 주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교실에서 일어난 이 작은 변화가, 제가 여전히 미술 수업을 하는 이유입니다.
짧고 뜨거웠던
한 아이의 시간
| 글 홍승아(문산중학교 교사)
신규 교사로 발령받은 첫 학교.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한 마음을 안고 첫 미술 수업에 들어갔습니다. 그 첫 시간에 유독 눈에 띄었던 한 남자아이.
중학교 3학년인 그 아이의 눈은 반항기로 가득했고,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어서 유독 눈에 띄었어요. 첫 시간이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지만,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듯한 눈빛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간단한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그 남자아이의 그림이 단번에 눈에 들어왔어요.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놀랐고, 따로 배운 적이 없다는 말에 또 한 번 놀랐죠.

학생 작품


학생 작품
미술 수업이
선물한 순간들
| 글 박혜린(보람고등학교 교사)
창작의 기쁨을 발견한 순간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앨범 재킷 리디자인’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곡을 선정하고, 자신의 느낌과 해석을 담아 앨범 표지를 새롭게 제작하는 수업이었죠. 그때 저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던 학생이 한 명 있습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남학생이었는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했지요. 특히 창작의 과정 자체를 무척 즐겨하던 모습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보통 수행 평가는 한 작품을 완성해 제출하면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제출용 작품 하나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5~10개의 작품을 더 제작해 저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꾸준히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죠.
표현의 질이나 완성도만 놓고 보면 많이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결과물의 완성도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창작의 과정을 온전히 즐기고 그 안에서 기쁨을 느끼던 학생의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누구보다 자유롭게 펼쳐 내던 그 모습은 수업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여운처럼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미술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모든 사람이 예술가로 태어나고 누구나 창작의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제 수업이 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 학생이 작업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음악이라는 요소가 학생에게 중요한 감각으로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수반 담당 선생님께 여쭤 보니 평소에도 특정 아이돌 노래의 안무를 굉장히 잘 춘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시각적인 방법으로 표출하는 과정에서 흥미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수업 후 작품 설명서를 작성하는 시간에 이 학생은 “미술 시간이 왜 중요한지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저는 미술 교사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찬사를 들은 듯한 감격을 느꼈습니다. 저는 평소 학생들에게 미술이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 왔습니다. 어쩌면 그 학생은 그 의미를 누구보다 진심으로 느끼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학생 작품, <앨범 재킷 리디자인>



말 한마디에 담긴 온기
‘이야기를 담은 수묵화’라는 수업을 진행할 때의 일입니다. 한 학생이 ‘버스 정류장에서’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써서 계획서를 제출했어요. 학원이 끝난 늦은 시각, 혼자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 낯선 아주머니께서 “오늘 날씨 참 좋지?”라는 말을 건네셨고, 그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던 경험을 적은 글이었죠.
그 글을 읽으며 저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처음 보는 학생에게 친근한 말을 건넨 아주머니의 다정함, 그리고 그 말을 따뜻하게 받아들인 학생의 마음이 동시에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 무렵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라는 책을 읽고 있어서 그 학생의 이야기가 더 깊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각박한 세상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향한 배려와 작은 친절은 우리 곁에 남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마음들을 버팀목 삼아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네요.
학생이 작품에 적은 마지막 글귀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순간 깨달았다. 작은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그 글을 읽으면서 저 역시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건넸던 말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격려와 용기가 되는 말이었을지, 혹은 마음을 위축시키는 말은 아니었을지 곱씹어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학생 작품, <버스 정류장에서>
꽃보다 빛나는 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거나 도움을 주었던 경험을 석고 붕대 손 입체로 표현하는 수업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따뜻함을 전하는 석고 붕대 입체 제작하기’라는 이름의 수업이었지요. 학생들은 자신이 경험한 따뜻한 순간을 떠올리며 석고 붕대로 손 입체를 제작한 뒤, 그 의미가 드러나는 장면을 연출해 사진으로 기록했습니다.
그중 한 학생의 작품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할머니의 손을 표현한 작품이었는데, 할머니를 향한 애틋함과 감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 한편이 뭉클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생은 교내의 꽃벽을 배경 삼아 황금색으로 채색한 석고 붕대를 촬영하고, 작품에 〈이제는 꽃보다 빛나는, 거칠었던 당신의 손〉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꽃’은 할머니께서 평생 사랑으로 키워 오신 엄마와 자신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이제는 할머니께서 꽃길만 걸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담겨 있다고 했지요. 그리고 그 꽃들보다 더 빛나는 것이 할머니의 손이라고 생각했기에, 석고 붕대를 황금색으로 채색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할머니의 거친 손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학생은 할머니의 손 사진을 확대해서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주름 하나, 손등의 굴곡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저는 미술이 학생들의 인성이나 정서 함양에 있어 정말 중요한 과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업을 계획할 때도 늘 그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마음 한편에 묻어 두었던 감정과 기억을 꺼내어 마주하고,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며 세상에 대한 시야를 넓혀 가는 과정은, 아이들이 한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그 학생 역시 이번 작업을 통해 자신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었던 누군가의 지극한 돌봄과 사랑을 다시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오래도록 가슴에 간직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학생 작품, <이제는 꽃보다 빛나는, 거칠었던 당신의 손>
아이들과 함께한
그 찬란했던 시간들
| 글 정한솔(이리남중학교 교사)
올해 벌써 초임 학교 6년 차, 마지막 해입니다. ‘벌써’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간 것 같습니다. 한 학교에서 오래 근무하는 것의 장점이라면, 아이들의 입학부터 졸업까지의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볼 수 있다는 점, 졸업생들과 계속 교류를 이어 갈 수 있다는 점이죠. 마지막 해를 기념하며 그동안의 발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보고자 합니다.
비바람 속에서 다시 태어난 걸개그림
저는 매년 5월에 열리는 체육 대회를 염두에 두고, 3월 중순부터 미술 수행 평가를 진행합니다. 처음에는 체육 대회 응원 깃발 만들기로 시작했지만,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졌어요. 이제는 각 반마다 세로 250cm 크기의 현수막에 아크릴 물감과 마커로 응원 문구와 그림을 그린 뒤, 운동장에 걸개그림처럼 게시합니다.
현수막의 크기가 큰 만큼 이 수업은 모둠 활동으로 진행합니다. 이 수업만큼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좋아하는 수업이 없어서, 재료비도 많이 들고 이것저것 손도 많이 가지만 매년 이어 가고 있죠.
2024학년도에는 어느 정도 노하우가 생겨서 많은 예산을 투입해 체육 대회 수행 평가를 진행했습니다. 아이들의 열정이 정말 반짝반짝 빛나서 저 역시 힘든 줄 모르고 두 달 동안 체육 대회 프로젝트에 몰두했죠.
체육 대회 5일 전, 예산을 절감해 보고자 아이들과 직접 운동장 난간에 현수막을 걸었어요. 21개의 현수막을 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미술부 아이들과 힘을 모아 작업을 마무리했습니다.
며칠은 현수막이 잘 버텼습니다. 그런데 체육 대회 하루 전날 강한 비바람이 몰아쳤고, 현수막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뜯겨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졌어요. 학교에서 아이들과 만나 머리를 맞대고 해결 방법을 고민했죠. 현수막 밑에 쇠나 나무 막대를 달고, 물을 담은 페트병을 끈으로 매달자는 의견이 나왔어요. 우리에게는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역할을 나누기 시작했죠. 현수막 끝에 막대기를 매다는 학생, 페트병을 구해 오는 학생, 현수막 매듭을 다시 묶는 학생까지, 저마다 할 일을 찾아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났어요. 너도나도 돕겠다며 아이들이 학교로 모여들었죠. 그리고 밤 10시가 되어 현수막을 다시 매달 수 있었습니다.
항상 어린아이처럼만 보였던 아이들이 스스로 역할을 찾아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울컥해졌습니다. 교실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아이들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 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그 아이들의 모습은 제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이들이 그린 선생님 얼굴
요즘 교권 추락으로 힘든 상황에 놓인 선생님들이 많습니다. 신규 교사 시절, 2학기 수행 평가를 마친 뒤 어떤 이벤트의 수업을 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담임 선생님을 위한 책을 만들어 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학생 몇 명에게 표지를 맡기고, 반 아이들 전체에게 롤링페이퍼 형식으로 글을 쓰게 했죠. 담임 선생님께 드리는 책이라 그런지 아이들이 평소보다 훨씬 더 정성을 쏟았어요. 평소 말썽이 많던 아이들까지도 빠짐없이 참여해서 책을 빼곡히 채웠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잘못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며, 그럼에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이끌어 주셔서 감사하다는 학생의 글귀가 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자신을 잊지 말라며 사진을 붙여 놓는 학생도 있었죠.


총괄 PD와 최강의 제작팀
3년 연속 제 업무는 축제였어요. 미술 교사라면 피할 수 없는 업무이기도 합니다. 첫해에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시작했고, 그다음 해부터는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이전보다 많은 걸 준비했죠.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는 언제나 미술부 아이들이 함께했습니다.
코로나19로 중단되었던 축제가 다시 열린 2022년, 그때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저는 총괄 PD가 되어 매일 늦은 저녁까지 아이들과 축제 준비를 했어요. 아이들은 저의 깐깐한 요구를 척척 해결해 내는 최고의 제작팀이 되어 주었지요.
어두운 무대를 만들고 싶다는 말에 아이들은 박스로 강당의 빛을 막기도 했습니다. 태블릿으로 한 땀 한 땀 그림을 그려 세상에 하나뿐인 리플릿을 만들어 내기도 했고요. 포스터, 부스 운영, 음향과 영상 제작까지, 축제의 모든 순간은 그렇게 저와 아이들의 손으로 채워졌습니다.
저는 축제를 준비하는 시간들을 영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부딪히고 고민하며 열정을 쏟아붓는 모든 과정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과의 시간을 담은 영상은 유튜브와 비공개 인스타그램에 차곡차곡 쌓여 갔죠. 몇 년 전에는 스튜디오와 협업해서 미술 수업 다큐멘터리 촬영도 했습니다.
축제를 함께 만들었던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단톡방에는 지금도 “그 시절이 가장 즐거웠어요”라는 말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그 찬란했던 시간의 기록 덕분에, 우리의 축제는 영원한 것이 되었습니다.
매년 똑같은 수행 평가를 하기 싫어하는 저는 방학 때마다 새로운 영감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매년 새로운 수행 평가를 준비합니다. 모작이 쉽다는 아이들에게 매번 새로운 창작을 요구하는 미술 선생님이지만, 저와 함께하는 미술 시간이 재미있어서 기다려진다고 말해 주는 아이들 덕분에 새로운 수업을 준비할 힘을 얻습니다.
이 기회를 빌려 우리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너희들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면 좋겠다. 내게 마르지 않는 영감을 줘서 고맙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