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이 팔레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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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와 아이들 모두에게 설렘과 긴장이 교차하는 새 학기 첫 미술 시간.
준비물이 부족해도 교실 안에는 이미 무수한 색과 이야기가 숨 쉬고 있다.
아이들의 소지품과 주변의 사물들을 펼쳐 놓는 순간, 평범한 교실은 하나의 거대한 팔레트로 변한다.
| 글 김은주(인천과학예술영재학교 교사)
| 에디터 김형국
새 학기, 첫 미술 시간
첫인상, 첫사랑, 첫걸음. '첫'이라는 한 글자가 붙는 순간, 평범한 순간은 이내 잊히지 않는 장면이 됩니다. 우리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그 특별함, 새 학기 '첫 미술 시간'이라고 다르지 않을 겁니다.
설렘과 긴장이 뒤섞인 교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선 아이들의 얼굴. 그 속에서 교사의 마음은 누구보다 분주해집니다. '무엇으로 이 소중한 시간을 열어야 할까?' 미술 재료를 챙겨오기엔 어수선한 첫날이지만, 그렇다고 첫 만남을 그저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미술 교사라면 누구나 품었을 법한 고민.
"새 학기 첫 시간, 준비물 없이도 아이들의 눈을 반짝이게 할 순 없을까?"
이 고민에 대한 저의 작은 대답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아이들이 이미 가진 것, 저마다의 소지품에서 ‘색’을 발견하며 떠나는 즐거운 탐구, 새 학기 첫 미술 수업을 위한 ‘사물색 놀이’입니다.
‘색’과의 어색했던 만남을 돌아보다
돌이켜보면 제 수업은 제가 가장 잘 알고 익숙한 길을 따라 흘러갔습니다. 입체를 전공한 저는 자연스레 형태 중심의 드로잉이나 입체를 구성하는 수업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반면 색과 평면을 다루는 수업은 이론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 일쑤였습니다. 학창 시절 제가 경험했던 무미건조한 색채 수업을 저 역시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던 거죠.
과거의 미술 시간을 떠올려 보면, 색은 주로 형태의 경계선 안을 채우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명도, 채도, 색상 같은 이론 수업은 포스터컬러를 이용해 정해진 방식대로 색을 채워 넣는 활동으로만 기억됩니다. 물과 물감의 농도를 맞추는 데 집중하느라 색을 ‘느낄’ 틈은 없었습니다. 색은 이해의 대상이라기보다 암기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이 저의 수업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아이들이 색과 조금 더 쉽고 즐겁게 만날 수는 없을까?”
저의 고민은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놀이로 배우는 우리 교실의 색
‘사물색 놀이’는 거창한 준비물이 필요 없습니다. 아이들의 소지품과 우리를 둘러싼 교실 환경이 곧 팔레트가 됩니다.
[1단계: 우리들의 색 꺼내놓기]
“자, 책상을 뒤로 밀고 가운데 공간을 넓게 비워 볼까요? 의자는 모두가 둥글게 둘러앉을 수 있도록 큰 원으로 배치해요.”
아이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익숙한 손놀림으로 책상을 밀고 의자를 원형으로 놓습니다.
“오늘은 색에 대한 수업을 할 거예요. 우리 주변은 온통 색으로 가득하죠. 이번 차시에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물건들을 배치해 보며 색을 이해해 볼 거예요. 각자 다채로운 색깔의 물건들을 가지고 있죠? 모두 교실 한가운데에 모아볼까요?”
아이들은 점퍼, 가방, 필기도구, 슬리퍼까지 각양각색의 물건들을 조심스레 교실 중앙에 꺼내 놓습니다. 망설이던 아이들도 친구들의 물건들이 쌓여가는 모습을 보며 즐겁게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교실 바닥은 형형색색의 물건들로 채워진 하나의 거대한 팔레트가 됩니다.

[2단계: 색, 질서를 찾다]
“정말 많은 색이 모였네요! 어떤 색들이 보이나요?”
아이들의 입에서 저마다 발견한 색의 이름들이 터져 나옵니다. “파란색이요!”
“저는 빨간색이 제일 많아 보여요.”
“노랑도 있어요.”
“저기 초록이요.”
아이들의 물건은 대개 6~8가지의 주된 색으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반 전체 아이들을 그 색의 수에 맞춰 모둠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각 모둠에게 자신의 색깔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한곳에 모으게 합니다.
“자, 비슷한 색들끼리 모았죠? 그림 지금부터 이 사물들을 같은 색끼리 한 줄로 이어서 크게 방사형으로 배치해 볼 거예요. 이제 선생님이 가운데에 하얀색 물건 하나를 놓을 건데요, 그걸 중심으로 바깥으로 갈수록 점점 더 진한 색을 놓아 보는 거예요.”
아이들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같은 색 물건끼리 한 줄로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물론 지시대로 각 색마다 가장 진한 색의 물건을 가장 바깥쪽으로 배치합니다. 마침내 교실 바닥에 색상환을 닮은 거대한 설치 작품이 완성됩니다.
“자, 이제 모두 의자에 올라가 볼까요? 색이 있는 물건을 방사형으로 둥글게 배치하니 어떤 느낌이 들어요?”
“선생님, 그냥 있을 땐 몰랐는데 비슷한 색끼리 모으니까 정말 예뻐요!”
“와, 우리 교실에 밝은색이 이렇게 많았네요!”“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색상환 같아요.”
“여러분의 소지품을 이렇게 펼쳐 놓으면, 여러분이 어떤 색을 좋아하고 어떤 색 물건을 주로 쓰는지 한눈에 알 수 있어요. 지금부터는 우리가 교실에 색을 질서 있게 구성했던 것을 떠올리며, 색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3단계: 놀이로 색의 원리 발견하기]
이제 아이들이 만든 설치 작품은 즐거운 놀이터이자 생생한 수업 자료가 됩니다.
“오늘은 색의 세 가지 속성을 알아볼 거예요.”
칠판에 ‘색상’, ‘명도’, ‘채도’를 적고, 교실 바닥에 배열한 사물들을 참고하여 이들의 관계를 이해하게 합니다. 아이들에게는 딱딱한 이론 수업이 아니라 색을 활용한 놀이로 다가오게 말이죠.
“바닥에 있는 물건의 색상을 이야기해 볼까요? 색상은 색의 종류를 의미해요. 그럼 색이 없는 물건은 무엇일까요? 색이 없는 물건을 우린 무엇이라 부르죠? 맞아요. 무채색이에요.?”
“자, 그럼 빨간색 중에서 가장 밝은 색의 물건을 찾아볼까요? 색상의 밝고 어두운건 명도라고 해요. 그럼 여러분이 고른 가장 밝은 색의 물건은 그 색의 가장 높은 명도의 색인 거예요.”
“채도란 말을 들어 봤죠? 채도는 색상의 선명함과 농도를 뜻해요. 색상에서 아무것도 섞지 않은 색을 의미해요. 그럼 초록색상 계열 중에서 가장 채도가 낮은 물건은 뭘까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색의 3원색,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 유사색과 보색 등의 관계도 설명합니다. 아이들은 분주히 몸을 움직이며, 머리가 아닌 눈과 몸으로 색의 원리를 체득합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색상환을 보여 주고, 교실 바닥에 배치한 물건들이 색상환의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맞혀 보게 합니다.
첫걸음, 그리고 다음 걸음으로
‘사물색 놀이’는 단발적인 수업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저는 이 활동을 <각양각색>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의 첫걸음으로 설계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색의 기초 이론 탐구를 시작으로, 하나의 색이 문화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해석되는지 조사하고, 최종적으로는 ‘나만의 색’을 찾아 영상으로 표현하는 과정으로 이어집니다.
긴 호흡의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첫걸음의 즐거움일 겁니다. 저는 프로젝트의 첫 수업이 지식이 아닌, 아이들 마음에 가닿는 따뜻한 경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사물색 놀이’를 통해 자신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색을 ‘발견’해냈고, 놀이라는 즐거운 몸짓으로 색의 다채로운 표정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색은 암기해야 할 지식을 넘어, 아이들 곁에서 함께 숨 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새 학기 첫 미술 시간, 선생님들께서 아이들에게 만들어 줄 새 친구는 어떤 모습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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